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은 화가이자 무대 디자이너, 소묘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아티스트이다. 스테판 테메르손은 작가이자 시인이며 작곡가였다. 예술가이면서 영화인이었던 테메르손 부부는 폴란드 아방가르드 영화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들을 함께 만들었고, 전쟁 후 이주한 영국에서 독립출판사인 '가베르보쿠스 프레스'를 설립해 국제적인 예술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은 1907년 6월 28일 바르샤바의 예술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우치아 카우프만 Łucja Kaufman과 언니인 마릴라 하이킨 Maryla Chaykin은 피아니스트였고, 아버지 야쿠프 베인레스 Jakub Weinles는 화가였다. 처음엔 음악원에 입학해 공부를 했지만, 1924년에서 1931년까지는 당시 미술학교라고 불렸던 미술원에서 공부했다.
스테판 테메르손은 1901년 1월 25일 프워츠크 Płock에서 태어났다. 의사면서 사회 활동가인 아버지 미에치스와프 테메르손 Mieczysław Themerson과 어머니 루드비카 테메르손 Ludwika Themerson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 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가족과 러시아에서 살았다. 1928년 학업을 위해 바르샤바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물리학을 공부하다 이후 건축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프란치슈카과 스테판이 처음 만난 것은 1929년이었다. 그리고 2년 뒤, 결혼식을 올린 이 두 예술가의 공통 관심사는 실험 영화였다. 당시 영화는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 있는 형식상 실험의 장이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두 사람은 다섯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들이 제작했던 영화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착한 사람의 일생 Żywot człowieka poczciwego (1937)》만이 남아있다고 알려졌고, 다른 네 작품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약간의 정보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테메르손 부부의 첫 번째 영화는 1930년에 제작한 4분짜리 영화 《약국 Apteka》이다. 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테메르손 부부는 널리 알려진 자신들만의 기법을 탄생시켰다. 특수 제작된 책상 위의 반투명 필름 위에 물건들을 놓고, 테이프를 이용해 아래에서 이를 촬영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알려진 포토그램 기법을 조금 변화시킨 것으로, 이때까지는 사진에서만 이용되었다. 자신 영화의 첫 번째 상영에 대한 테메르손의 회고담은 가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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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물었죠, '저 물방울들은 화면에서 뭘 하는 거지?' 그때 저는, 할 말이 딱히 없으면 정말 아무 말도 할 줄 몰랐던 때였습니다. 물방울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침묵했죠. 그러자 다들 저보고 거만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거만한 게 아니었어요. 시골에서 온 창피를 모르는, 뭘 원하는지는 알고 있던 젊은이었지만, 원하는 것 앞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쌓여있는지는 몰랐어요."
두 번째 영화 《유럽 Europa (1932)》은 아나톨 스테른 Anatol Stern 시인의 시를 영화화한 것이다. 스테른은 스테판이 자신의 시를 영화화하겠다고 했던 테메르손 부부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 제안을 – 당연히 이해하시겠지만 –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르네 클레르 René Clair, 만 레이 Man Ray, 부뉘엘 Buñuel의 실험영화들을 그저 젠체하는 괴상한 짓거리로 보는 나라에서 이런 제안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기적적으로 놀라운 일이었어요. 우리는 대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스테판과 프란치슈카가 영화 계획과 시나리오를 써 왔어요. 저는 거의 수정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나 열광적인 상태라 테메르손 부부의 작업에 전혀 비판적이 될 수가 없었어요. 폴란드에서 이 새로운 예술이 걸어갈 가시밭길에 대해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상영에는 스테른의 암송과 축음기로 튼 음악이 함께 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었지만, 테메르손 부부는 유제프 로바코프스키 Józef Robakowski의 부탁으로 1970년대에 이 영화의 몽타주 목록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2019년, 필레츠키 연구소 Pilecki Institute는 베를린의 분데스아르히브 Budesarchive에서 《유럽》을 찾아내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스크리닝 행사는 2020년 테이트 모던에서 열렸다.
1933년 제작된 《멜로디가 있는 소품 Drobiazg melodyjny》은 양품 회사의 광고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광고에는 소리가 들어갔고,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 상영되었다. 1935년에는 사회문제연구소 Instytut Spraw Społecznych의 의뢰로 영화 《합선 Zwarcie》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일종의 공익광고 같은 것으로, 전기 이용 시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 관객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영화 음악 작업에는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Witold Lutosławski가 참여했다.
《착한 사람의 모험 Przygoda człowieka poczciwego》은 전쟁 전 테메르손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로, 1937년에 제작되었다. 영화 소제목인 ‘비상식적인 유머레스크’에 걸맞게 착한 주인공은 어느 날 장롱을 옮기는 두 남자 (이 모티브는 19년 후 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ński의 유명한 습작영화 《두 남자와 장롱 Dwaj ludzie z szafą》에서 다시 이용된다)가 ”뒷걸음질로 간다면 하늘에 구멍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뒷걸음질로 여행길에 떠난다. 영화 음악은 스테판 키시엘레프스키 Stefan Kisielewski가 맡았다.
미국의 예술가인 브루스 헤체프스키 Bruce Checefsky는 《약국》과 《멜로디가 있는 소품》을 재구성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바르샤바 현대 미술관 Muzeum Sztuki Nowoczesnej의 영화 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1935년에는 과거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던 예술영화인협회 Stowarzyszenie Miłośników Filmu Artystycznego '스타트 Start'의 회원들과 함께 다시 영화제작인공동체 Spółdzielnia Autorów Filmowych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반다 야쿠보프스카Wanda Jakubowska, 알렉산데르 포르트 Aleksander Ford, 스타니스와프 볼Stanisław Wohl 등이 속해있었다. 테메르손 부부는 또한 폴란드어, 프랑스어, 영어의 3개 국어로 예술 영화 잡지인 《파 f.a》의 편집을 맡았다.
두 사람은 영화에만 자신들의 예술활동을 국한하지 않았고, 함께 어린이책을 만들기도 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스테판이 글을 쓰고, 프란치슈카가 그림을 그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야쿠프 마이무레크 Jakub Majmurek와의 《정치 비평 Krytyka Polityczna》 인터뷰에서 테메르손 부부의 전기를 쓴 아드리아나 프로데우스 Adriana Prodeus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었어요. 테메르손 부부에게 있어 책 그 자체는 예술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시각적인 텍스트라고 불러도 될 거예요. 텍스트, 활자, 일러스트레이션 모두가 단어와 똑같이 중요했죠. 물론 프란치슈카는 얀 브제흐바 Jan Brzechwa의 《바늘이 실과 춤을 추었네 Tańcowała igła z nitką》와 같은 다른 책이나 프랑스의 플라마리옹 Flammarion 출판사의 책에도 그림을 그렸지만, 단지 일러스트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의 일이었어요. 프랑스로, 그리고 영국으로 이주했을 때 그렇게 생계를 유지한 거죠. 하지만 그들의 책은 단순히 어린이뿐 만을 위한 것이 아닌, 어른을 위한 작품이면서 글과 시각이 이루는 전체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37년 말 테메르손 부부는 파리로 이주하는데, 이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맞고 만다. 전쟁 이후 프란치슈카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폴란드 망명정부의 선전물들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덕분에 1940년에는 런던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스테판은 군대로 징집되었다가 1942년에 아내와 영국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2년에 이르는 부부의 생이별 기록은 2019년에 나온 책 《부치지 못한 편지. 편지, 일기, 드로잉, 문서, 1940-1942 Niewysłane listy. Listy, dzienniki, rysunki, dokumenty. 1940-1942》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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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의 프란치슈카 테메르손 / 사진: 테메르손 재단 Themerson E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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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영국에서는 《스미스 씨를 부르다 Calling Mr. Smith (폴란드어: Wyzwamy Pana Smitha)》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실험적이면서 시적인 다큐멘터리로, 폴란드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끔찍함에 대해 영국인들의 주의를 환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검열 당국은 영화의 일부를 고치기를 강요했는데, 예를 들어 젊은 아가씨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2년 후인 1945년에, 테메르손 부부는 카롤 시마노프스키 Karol Szymanowski가 율리안 투빔 Julian Tuwim 의 시에 작곡한 작품번호 46번의 《단어 노래 Słopiewnie》 다섯 곡 중 네 곡을 자신들의 마지막 영화인 《눈과 귀 Oko i ucho》로 만들었다.
1948년에는 출판사인 '가베르보쿠스 프레스 Gaberbocchus Press'를 창립했는데, 출판사의 이름은 루이스 캐럴 Lewis Caroll이 만든 말로, 작가가 소설 제목으로도 썼던 ⟪재버워키 Jabberwocky⟫에서 가져왔다. 가베르보쿠스 프레스는 31년의 세월 동안 총 60권이 넘는 책을 펴내었고, Bertrand Russel, 레이먼드 퀴노 Raymond Queneau, 아나톨 스턴, 스테판 테메르손 자신의 저작을 포함한다. 이 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알프레드 자리 Alfred Jarry의 《우부 왕 Ubu Król》으로, 이 작품에 매료되었던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은 의상과 무대 디자인을 맡아 스톡홀름의 마리오네트 극장에서 미하엘 메슈케 Micheael Meschke 연출로 1964년 무대에 올렸고, 1970년에는 《우부 Ubu》라는 제목의 만화책을 펴내기도 했다.
1957년 문을 연 '커먼 룸 Common Room'은 예술가들과 학자, 지성인들이 모여 서로 발표하기도 하고,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콘서트와 전시, 토론의 장이 되기도 한 곳이었다. 전쟁 전 폴란드에서 테메르손 부부가 그랬듯, 두 사람은 이러한 행사를 조직하고 기획하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이미 존재하는 다른 그룹에 들어가기보다는 자신들의 원칙을 가지고 새로운 모임을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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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은 그림과 드로잉을 하고, 무대 디자인과 의상을 만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우부 왕》을 비롯해 스톡홀름의 마리오네트 극장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서푼짜리 오페라 Opera za trzy grosze》를 올렸고, 영국의 바스 미술원과 윔블던의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했다. 프란치슈카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양방향 추상화 bi-abstract'라 설명했는데, 1957년 커먼 룸에서 있었던 강의에서 정식 교육을 마치자마자, 계속해서 나만의 시각적 언어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표현주의도, 추상표현주의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결국은 스스로 양방향 추상이라 이름 붙인 본인의 회화 스타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은 영국의 상위 계급의 대표자들인 실크햇을 쓴 남자들, 이민 와서 알게 된 이들을 자신의 그림에 넣기 시작하며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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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죠. 실크햇을 쓴 남자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에요. 자기가 쓰던 실크햇들에 대해 잊어버리고, 그리고 자기들이 심각한 존재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이죠. 더 이상 우스워지지 않은 거죠.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도 자신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신사가 아니라, 남자, 아니 가끔은 여자가 되기도 했죠. 이제 두려움이나 걱정을 표현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그것은 관객의 감정에 표현주의적으로 직접 개입하는 방식도 아니었어요."
Author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의 강의 《양방향 추상화 Obrazy bi-abstrakcyjne》
바로 그 강의에서 테메르손은 한 평론가가 자신의 그림을 '현대의 하얀 동굴벽화'라고 말한 순간이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반면에 스테판 테메르손은 주로 글을 썼다. 저작을 시작한 것은 1930년대였고, 어린이책부터 시작했다. 프란치슈카와 떨어져 있던 전쟁 시기에는 시를 썼고, 1943년 《하늘의 바닥 Dno nieb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런던으로 이주한 이후 초기에는 이민 출판사들과 협업을 통해 안토니 스워님스키 Antoni Słonimski가 편집하던 월간지 《새로운 폴란드 Nowa Polska》에 1946년 《바야무스, 의미론적 시의 연극 Bayamus, czyli Teatr Poezji Semantycznej》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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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론적 시란 일부 활자의 실험에서 나오는 것이며, 다른 일부는 의미와 의미론적 분석에 대한 비판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대답의 명확성과 분명함을 추구하며, 단어가 가진 원래의 의미로 되돌아가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결국 단어들은 그들의 사전적인 의미나, 비선형적인 그래픽의 구성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의미론적 시는 연상작용의 모든 아우라를 벗어난 단어들로 시를 창작하는 것, 사전이 주는 바로 그런 가장 단순한 의미로 쓰인 시와 비슷하다."
Author
P. 마티시아크 P. Matysiak, 《정의되지 않은 공간. 스테판 테메르손의 예술적 전략. Przestrzeń nie(o)pisana. Stefana Themersona strategia artystyczna》
1942년, 스테판 테메르손은 첫 번째 소설이었던 《마아 교수의 강의 Wykład profesora Mmmaa》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53년 영어로 출간되었고, 물론 가베르보쿠스 프레스를 통해 나왔다. 이 책은 테메르손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흰개미의 시각으로 본 철학적 소설이다. 테메르손 자신이 영어판을 준비하였고, 서문은 유명한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이 다음과 같이 썼다.
"탄탄하고, 표현력과 상상력에 차 있으며 날카로운 유머 감각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웃다가 데굴데굴 구를 거라고 약속할 순 없지만, 난센스의 분석에서 흘러나오는 씁쓸한 즐거움을 약속할 수는 있다."
러셀과 테메르손은 서신교환으로 처음 만났고, 테메르손은 러셀에게 자신의 글을 보내곤 했다. 서신교환은 곧 개인적인 우정이 되었다. 테메르손은 러셀에게 지적인 영향을 받아, 그를 만나기 전에 이런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이미 당신의 책은 오래전부터 제 핏속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활기를 주는 요인으로, 가끔은 저를 미치게 하는 원인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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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의 그림 앞에 선 스테판 테메르손 / 사진: CSW Warsz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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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작품에서 스테판 테메르손은 스스로 《마아 교수의 강의》를 쓰면서 철학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그 분야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파고들면서도, 한편으로 이러한 지점을 비꼬기도 하였다. 《마아 교수의 강의》는 날카로운 비판과 공들여 세워진 흰개미 세상을 바탕으로 훌륭한 소설로 남아있으며, 다른 테메르손의 소설들 역시 유머에 넘치는 줄거리와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다.
테메르손의 작품 일부는 영어로 쓰였는데, 테메르손은 외국어를 통한 창작이 주는 가능성에 매혹되어 있었다. 《톰 해리스 Tom Harris》, 《유클리데스는 노새였다 Euklides był osłem》, 《홉슨의 섬 Wyspa Hobsona》등은 에바 크라신스카 Ewa Krasińska, 이레나 시만스카 Irena Szymańska, 에바 크라스코프스카 Ewa Kraskowska의 번역으로 폴란드어 출간되었다. 하지만 《폴라투오 추기경 Kardynał Pölätüo》, 《마아 교수의 강의》 등은 스테판 테메르손 자신이 영어로 옮겼다. 테메르손의 책 대부분은 가베르보쿠스 프레스에서 출간되었지만, 《정어리의 비밀 The Mystery of the Sardine》과 《홉슨의 섬》만이 파버 앤 파버 Faber and Faber에서 출간되었다.
'테메르손 부부의 날'을 기획한 마르친 기지츠키 Marcin Giżycki는 ⟪슘 Szum (속삭임)⟫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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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테메르손의 저작 전체는 (...) 거대한 도덕 논문과도 같습니다. 바른 행동 양식과 자연에 대한 윤리 (...) 는 수필뿐 아니라, 사실 어디에서보다 소설에서 드러납니다. 전하려는 메시지는 사실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 형식이 매우 특이한 것이죠."
1972년 스테판 테메르손은 의미론적 오페라인 《성 프란시스코와 굽비오의 늑대 Święty Franciszek i wilk z Gubbio》를 썼다. 이 리브레토와 악보는 테메르손의 작품이라면 짐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된 콜라주로 되어 있었다.
테메르손 부부는 1988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슈카 테메르손은 6월, 스테판 테메르손은 9월에 타계하였고, 그들이 남긴 작업은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프란치슈카의 조카딸 야시아 라이하르트 Jasia Reichardt가 관리하고 있다. 야시아 라이하르트와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정리한 테메르손의 아카이브는 2015년 폴란드 국립중앙도서관의 구매로 폴란드에 보관되고 있다.
자료: 야누시 라호프스키 Janusz Lachowski, ⟪아나톨 스테른과 스테판 테메르손. 유럽에 대해서, 그리고 1959-1968년 두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우정의 회신 Anatol Stern i Stefan Themerson. O Europie, a także przyjaźni dwóch awangardzistów na podstawie ich korespondencji wzajemnej z lat 1959-1968⟫, 국립중앙도서관 연감 Rocznik Biblioteki Narodowej, 2015, TOM XLVI, s. 269-288; ⟪테메르손 부부. 개가 미술사를 강의하다. Themersonowie. Pies wykłada historię sztuki⟫, 야쿠프 마이무레크 & 아드리아나 프로데우스 대담, rozmowa Jakuba Majmurka z Adrianą Prodeus, 정치 비평 Krytyka Polityczna; ⟪스테판 & 프란치슈카 테메르손 Stefan i Franciszka Themerson⟫, 1982년 우츠 미술관 카탈로그 katalog wystawy zorganizowanej przez Muzeum Sztuki w Łodzi, 1982; ⟪테메르손 부부의 창작과 삶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대한 메모 Notatki do krótkiej opowieści o życiu i twórczości Themersonów⟫, ⟪테메르손 부부 – 영화와 이야기 Themersonowie – film i opowieść⟫, 마우고자타 사디 Małgorzata Sady, 콘텍스티 Konteksty 1:97-102; ⟪발 걸기 Podstawianie nogi⟫, 카롤리나 이바슈키에비치 & 아담 플루슈카 Karolina Iwaszkiewicz i Adam Pluszka, ⟪드부티고드니크 Dwutygodnik⟫; 바르샤바 '테메르손 부부의 날' 기획자 마르친 기지츠키와의 대담 Rozmowa z Marcinem Giżyckim, współkuratorem Dni Themersonów w Warszawie, 매거진 ⟪슘 (속삭임) Szum⟫
저자: 나탈리아 사예비치 Natalia Sajewicz (2020년 11월) / 번역: 이지원 (2023년 3월) / 편집: AL (202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