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폴란드 영화
1960년대 중반 폴란드 영화계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탄생했는데, 이는 몹시 자의적이면서 다소 기계적인 명칭인 '제3의 폴란드 영화 Trzecie kino polskie'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들이 탄생시킨 '폴란드 영화학파'를 따라 여전히 전쟁 전 스타일을 유지하며 제작된 작품이 발표된 이후, 새로운 전후 세대가 폴란드 영화계에 등장했다. 일명 '소규모 안정기'라 불리던 1960년대 무렵 성인기에 접어든 이들은 새로운 전후 현실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당시 폴란드인들이 경험한 현실을 가장 먼저 다룬 이들 중 하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주제가 장편 영화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지 프와제프스키 Jerzy Płażewski는 저서 ⟪모두를 위한 영화 역사 Historia filmu dla każdego⟫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3의 폴란드 영화는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추구한다. 이는 사회주의 안정기에 대한 진실이자,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진실이며, 기존 세계와 그 윤리적 규범의 태도에 관해 결정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진실이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는 폴란드 영화사에서 제3의 폴란드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라 가히 칭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영화 속 주인공은 당국의 사회적 관점에서 주제를 제시하고 개인주의가 부적절하다는 내용을 기대했던 비평가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1967년 발간된 ⟪키노 Kino⟫ 잡지 13호에서 콘라트 에베르하르트 Konrad Eberhardt는 스콜리모프스키 작품 속 주인공에 대해 '성숙함을 거부'하며 '패턴에서 탈피'한다고 정의했다.
"영화 속에는 수많은 모순이 등장한다. 자신의 개성과 체면을 살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우월한 운명에 종속된 공동체와 어우러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한편으로는 열망, 다른 한편으로는 게으름, 대단한 업적에 대한 갈망, 낭비된 연구, 헛되이 버려진 시간, 놓쳐버린 기회와 같은 일련의 연속된 모순들 말이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달리 스콜리모프스키 영화에 대한 비평의 검열에서 우회하기 위한 '언어의 곡예'가 필요하지 않다. 영화 잡지 ⟪키노⟫ 의 2004년 7-8호에서 토마시 욥키에비치 Tomasz Jopkiewicz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시 일부 비평가들이 가졌던 의구심을 이해할 수 있다. 명백히 사회적 규칙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사회적 규칙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명한 시도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나'를 구하는 것이다. 집단이 갖는 수치스러운 우위를 인정하기 위해 완고하고 조용히 거부하는 것이다.
탈출, 방황, 탐색. 다양한 얼굴과 가면을 쓰고 있다. 나만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 동시에 돌이킬 수 없이 내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항복하지 말 것. 실수할 권리,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착지를 찾고, 또 잃을 권리를 위한 투쟁. 이것이 스콜리모프스키 영화 속 주인공들을 괴롭힌 딜레마이다. 이는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1960년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이 딜레마를 가장 잘 이끌어냈다. 그는 독특한 모든 것들로 시선을 돌렸고, 전기(傳記)와 주인공 사이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일종의 서정적이면서 자기비하적인 일기장을 만들어 냈다."
스콜리모프스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몽상가'로 불리는데, 이에는 악의적이면서도 때로는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있다. 이들은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영화 속 주인공들과 비교되기도 하며, 내레이션이 진행되는 방식에서도 유사점이 드러난다. 소위 스콜리모프스키로 대표되는 제3의 폴란드 영화는 프랑스 누벨바그 경향에 따라 때론 '폴란드 뉴웨이브'로도 불렸다. 알렉산데르 야츠키에비치 Aleksander Jackiewicz는 저서 ⟪나의 필모테카. 폴란드 영화 Moja filmoteka. Kino polskie⟫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66년 베르가모국제영화제 현장. 이 명망 높은 영화제는 아방가르드와의 연대를 안전하게 강조하고자 했고,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장벽⟫에 대적할 그랑프리 후보 작품을 찾지 못했다. 이 영화는 당시 널리 알려진 '뉴 시네마' 정신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의 특징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속에서 관찰된 현실에 나 자신, 세계, 영화에 대한 감독의 '편향된 진술이 혼합된 장뤽 고다르의 작품과 호환되었다."
고다르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츠키에비치는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 속 '현실에 대한 충실도'를 중요시했다. 야츠키에비치가 강조한 바와 같이,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를 완성해냈다. 다른 비평가들 또한 프랑스 감독들의 작업 맥락을 고려해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영화를 분석했다. 지그문트 카우진스키 Zygmunt Kałużyński는 1965년 발행된 ⟪폴리티카 Polityka⟫지 51호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스콜리모프스키의 작품과 '뉴 웨이브' 스타일은 일상적이면서도 엄격한 다큐멘터리 방식을 적용한 감독의 '인식'으로 연결된다. 삶의 가장 평범한 순간에서 비범함과 시를 발견하고, 어떠한 소품이나 상황이든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부여한다."
⟪신원 미상⟫, ⟪부전승⟫에 이어 발표한 세 번째 장편 영화 ⟪장벽⟫ 또한 여전히 같은 경향을 보이지만, 현실 묘사를 목표로 하는 촬영 기법에서 기호의 언어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이전 두 작품과는 달리 감독 자신이 배우로 출연하지 않고, 정치적 요인이 개입했다는 점에서 다소 덜 개인적인 특징을 갖는 작품이기도 하다.
스콜리모프스키는 다음 영화인 ⟪손들어!⟫에서 더 큰 문제에 직면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폴란드청년연합 ZMP(공산당과 밀접한 청년 조직) 회원의 이미지가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스탈린의 모습이 그려진 대형 포스터를 준비하던 중 학생들이 실수로 두 쌍의 눈을 달아주는 장면이 문제가 되었다.
1967년 봄에 제작된 ⟪손들어!⟫는 검열로 인해 수년간 상영이 중지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계엄령 도입 직전인 1981년이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는 이민을 결심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감독은 2001년 2월 8일 폴란드 일간지 ⟪가제타 비보르차 Gazeta Wyborcza⟫를 통해 소개된 요안나 포고젤스카Joanna Pogorzelska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인생을 망친 주범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생각하면 혐오감이 듭니다. ⟪손들어!⟫만 아니었어도 여전히 폴란드 뉴 웨이브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겠죠. 하지만 저는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