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을 위해 신문 잡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버린 남자. 20여 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피오트르 소하의 ⟪꿀벌⟫과 ⟪나무⟫는 마치 오래된 식물학 도감 같은 느낌을 준다. 요리하는 것과 스테레오타입을 타파하는 것을 좋아하며, 영감이 아니라, 열심히 작업하는 것을 믿는다.
피오트르 소하 Piotr Socha는 작업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머리를 꼽는다. 그 안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의 전체 컨셉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연필로 그린 스케치는 완벽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고친다. 그리고 깨끗이 흑백 드로잉을 한 후, 스캔한다. 색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더해지며, 한 개씩 있었던 요소들은 합쳐지고 여러 개로 늘어나며 손질된다. 그림 작업 중에는 소리가 함께한다. 전체의 얼개를 잡을 때는 잔잔한 음악이나 라디오, 그 이후 단계에는 오디오 북을 듣기도 한다. 일러스트레이터로 30년이라는 세월을 일하고 있지만,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이 그에게 당연한 것만은 아니었다.
피오트르 소하는 예술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후회는 없다고 한다. 사실적인 드로잉을 하는 것은 18살 때 배웠다. 대학은 심리학과를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진학한 교대에서 선생님이 되긴 힘들 것 같으니 미대 시험을 쳐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렇게 입학한 바르샤바 국립미술원을 졸업한 것은 1992년이었다. 지도교수인 야누시 스탄니 Janusz Stanny 아래 준비한 졸업 작품은 중세 스페인의 사랑의 시를 유리 위에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었다. 스탄니에게서 소하는 극사실주의보다는 연극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더 힘 있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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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일러스트레이션 / 글: 보이치에흐 그라이코프스키 / 그림:피오트르 소하 / 사진: 드비에 시오스트리 출판사
스탄니 교수의 지도 아래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지만, 결국 소하는 신문 잡지 일러스트레이션의 길을 택했다. ⟪가제타 비보르차 잡지 Magazyn Gazety Wyborczej⟫, ⟪폴리티카 Polityka⟫,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Harvard Business Reviews⟫, 폴란드판 ⟪플레이보이 Playboy (글: 한나 바쿠와 Hanna Bakuła)⟫을 일러스트레이션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마히나 Machina⟫ 잡지의 수석 그래픽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어쩌다 들어오는 그림 작업도 하곤 했는데, 콜라 상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적도 있었다. 소하의 그림은 지나칠 정도로 세부 묘사에 집착하면서도 화려하고 즐거운 색채의 사용과 아이러니가 녹아있으며, 무엇보다 함께 낄낄거릴 수 있는 유머 감각이 있다. 하지만 스탄니 교수가 내준 풍자 일러스트레이션 숙제를 해내기 위해서는 1주일 내내 고생했다고 한다.
20년이 넘도록 했던 신문 잡지 일러스트레이션에는 이제 그만!을 외쳤다. 소하는 알렉산드라 미지엘린스카 Aleksandra Mizielińska & 다니엘 미지엘린스키 Daniel Mizieliński 부부의 ⟪지구촌 문화 여행 MAPY⟫의 세계적인 성공에 영감을 받아 책 일러스트레이션을 시작했다. 잡지 ⟪비다프차 Wydawca (역자주: 출판인)⟫에 실린 안제이 팔라치 Andrzej Palacz와의 인터뷰에서 소하는 드비에 시오스트리 Dwie Siostry 출판사와 처음 일했을 때를 회상한다.
"[...] 옛날 자연 백과사전의 일러스트레이션과 비슷하게 만든 일러스트레이션을 출판사에 보냈어요. 그 안에는 제가 그린 상상의 곤충들도 있었죠. 출판사에서는 나비, 잠자리, 무당벌레 그림은 좋아했지만, 상상의 곤충을 그린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름다우면서도 교육적인 책을 출판해야 했으니까요. [...] 한번은, 우리 아버지가 양봉인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럼 꿀벌에 대한 책을 내보죠'라고 에바 스티아스니 Ewa Stiasny가 말한 거예요. 마치 누군가가 전기 스위치를 꽂은 것처럼, 전 이게 정말 딱 내가 할 만한 주제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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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트르 소하의 ⟪꿀벌⟫ 일러스트레이션 / 글: 보이치에흐 그라이코프스키 / 사진: 드비에 시오스트리
글을 쓴 보이치에흐 그라이코프스키 Wojciech Grajkowski와 함께 피오트르 소하는 꿀벌 왕국에 대한 커다란 그림책을 만들었다. 놀랄만큼 자세한 지식과 빽빽한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웃기는 그림들, 놀라운 연상과 매우 개성적인 그래픽 스타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소하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옛 식물도감의 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대담한 색채의 조화와 다양한 형태, 형태의 스케일의 변화를 통해 새로 살아났다. 평평하면서 3차원의 효과는 없는 그림이지만, 훌륭하고 자세한 세부 묘사는 독자를 매혹시킨다. ⟪꿀벌 Pszczoły (2015)⟫은 금새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고, 2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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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책의 표지와 일러스트레이션 / 글: 보이치에흐 그라이코프스키 / 사진: 드비에 시오스트리
3년 후 소하와 그라이코프스키는 다시 한번 교육적인 내용을 주제로 한 판형 그림책의 성공을 되풀이한다. 이번 주제는 나무였다. 생물학자가 쓴 재미있는 내용들로 가득한 텍스트는 피오트르 소하의 상상력이 가득한 작품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주제로 보아서는 꿀벌의 세계보다 더 지루할 것 같지만, ⟪나무 Drzewa (2018)⟫는 더욱더 신묘한 구성을 보여준다. 모든 가지가 휘어진 방향이 다 다르고, 이 책에 나오는 나뭇잎 모양만으로도 백과사전을 하나 만들 수 있을 정도이며 같은 색의 초록을 찾기도 쉽지 않다. 소하가 이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2년 동안 작업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꿀벌⟫ 뿐만 아니라 ⟪나무⟫ 역시, 이 책들은 그냥 재미있는 일화를 모은 것이 아니라, 자연에 바치는 나름의 찬가이다. 자연계의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존경심과 지구의 미래에 대해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폴란드 인터넷 포털 오넷 Onet의 인터뷰를 함께 했던 에밀리아 파도우 Emilia Padoł에게 피오트르 소하는 이런 희망 사항을 말하고 있다.
"저는 제 책을 본 아이들이, 그리고 어른들 역시, 수많은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자연을 좀 더 가까이 관찰했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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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 냄새나는 세계사⟫ / 글:모니카 우트니크-스트루가와 / 기획 & 그림: 피오트르 소하 / 사진: 드비에 시오스트리
소하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역사와 사람이다. 모니카 우트니크-스트루가와Monika Utnik-Strugała가 글을 쓴 ⟪더러워. 냄새나는 세계사 Brud. Cuchnąca historia higieny⟫ 를 보면 그 사실이 역력히 드러난다. 바로크 스타일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은 위생과 의학과 관련한 관습과 미신에 대한 아이러니와 블랙 유머로 가득 찬 이야기로 독자를 초대한다. 피오트르 소하는 세바스티안 프롱츠키에비치 Sebastian Frąckiewicz의 책인 ⟪이 팔꿈치는 잘못 구부러졌네 Ten łokieć źle się zgina⟫에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드게임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알아보기 쉽고, 정보 전달이 명확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해요. 지저분하거나 칙칙한 스타일이면 안 되겠죠, 그랬다가는 게임이 팔리지 않을 테니까요. [...] 놀랍게도 제가 일러스트레이션을 했던 보드게임들은 상당히 잘 팔렸어요. 어쩌면 사람들이 매체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본 제 그림을 기억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첫 번째 게임이 잘 팔려서, 덕분에 계속해서 다른 의뢰를 받을 수 있었죠."
소하는 보통 게임에 쓰이는 동전에서부터 게임판과 상자까지 보드게임 전체를 디자인한다. 이미 출판되었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드게임 ⟪CV (2013)⟫과 후속판이었던 ⟪문명 CVlizacja (2015) ⟫에서 쓰기도 했는데, 두 게임 모두 해외에서 호평받았다. 소하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적도 있다. 1999년에는 폴란드 제1방송을 위한 그래픽 디자인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고 소하가 생각해 낸 십몇초짜리 영상들은 플라티지 이미지 Platige Image 사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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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하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는 책 일러스트레이션이다. ⟪꿀벌⟫ 책은 열 몇 개나 되는 상을 받았고, 뮌헨의 국제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 Internationale Jugendbibliothek전문가들이 전 세계 책들 중에서 추천 도서로 고르는 화이트 레이븐즈 목록에도 올랐다. ⟪나무⟫는 불가리아의 어린이책 재단이 주는 '마술 진주 (2021)' 상을 받았고 미국의 '퍼블리셔스 위클리 Publishers Weekly'의 상도 받았다. 두 책은 모두 연간 9,000종이나 되는 어린이책이 출간되는 시장인 독일에서도 매우 잘 팔리고, 중국에서는 만다린과 광둥어 버전이 모두 출간되었으며, 머나먼 호주 태즈매니아에서도 꿀벌 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액자에 넣어져 꿀과 꿀로 만든 상품을 파는 가게 벽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피오트르 소하 국내 출간작
- ⟪마샬 아저씨의 행복찾기 Papà Famondo⟫ | 글: 브루노 토뇰리니 Bruno Tognolini | 그림: 피오트르 소하 | 번역: 홍승수 | 출판: 아가월드 | 2012년
- ⟪꿀벌 Pszczoły⟫ | 글: 보이치에흐 그라이코프스키 Wojciech Grajkowski | 그림: 피오트르 소하 | 번역: 이지원 | 출판: 풀빛 | 2017년
- ⟪나무 Drzewa⟫ | 글: 보이치에흐 그라이코프스키 | 그림: 피오트르 소하 | 번역: 이지원 | 출판: 풀빛 | 2018년
- ⟪더러워: 냄새나는 세계사 Brud. Cuchnąca historia higieny⟫ | 글: 모니카 우트니크-스트루가와 Monika Utnik-Strugała | 그림: 피오트르 소하 | 번역: 김영화 | 출판: 풀빛 | 2022년
글 아그니에슈카 바른케 Agnieszka Warnke / 번역: 이지원 / 편집: 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