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광주비엔날레 폴란드 파빌리온: 투명한 절벽 끝에서 내딛는 한 걸음
제16회 광주비엔날레가 오는 9월 5일 막을 올린다. 올해로 세 번째로 선보이는 폴란드 파빌리온은 관객을 각기 다른 공간으로 이끌며, 그 여정 속에서 변화와 그에 수반되는 의례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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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소설 ⟪흰⟫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아담 미츠키에비츠 문화원이 주관하는 제16회 광주비엔날레 폴란드 파빌리온 전시 ⟪통과의례 Rites of Passage⟫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한강은 바르샤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당시 소설 ⟪흰⟫을 집필했다. 작품 속에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폐허 위에서 다시 태어난 '하얀 도시'이자, 재생과 끊임없는 변화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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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차 비엘라프스카, ⟨시간의 물질⟩, 2026, 도자에 유약 / 사진: Bartosz Górka
개인의 삶에서 지정학적 현실까지
"소설 ⟪흰⟫에서 발췌한 이 구절은 변화가 우리 삶의 불가피한 일부임을 일깨워줍니다."
전시 큐레이터 파울리나 올셰프스카 Paulina Olszewska는 이 구절을 제16회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인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You Must Change Your Life'와 연결해 설명한다.
"우리는 생물학적 차원뿐 아니라 개인적, 사회적, 영적인 삶에서도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오히려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 예외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셰프스카는 전시를 구상하며 프랑스 인류학자 아르놀트 판 헤네프 Arnold van Gennep가 제시한 개념을 바탕으로, 변화의 순간을 구분 짓는 '통과의례'에 주목했다. 문화와 사회 속에 자리 잡은 의례뿐 아니라,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과거의 전통과 정립된 구조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하는 개인적 의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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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는 경험
통과의례는 불확실하고 정체된 상태를 지나 변화에 이르는 과정을 전시 구조에 담아낸 몰입형 예술 프로젝트다. 관객은 서로 다른 공간을 차례로 거치며, 각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감각과 감정을 경험한다.
"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공간을 중요하게 다뤄온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구성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적 맥락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 서로 호응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며 대화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리차 비엘라프스카 Alicja Bielawska는 직물과 도자기로 구성된 설치작품과 종이 작업을 선보인다.
인사이드 잡 Inside Job은 울라 루친스카 Ula Lucińska와 미하우 크니하우스 Michał Knychaus로 이루어진 듀오로, 배의 늑골을 연상시키는 산업적 형태의 구조물을 선보인다. 공간에 견고히 자리 잡은 구조이면서도, 동시에 이동과 먼 거리를 가로지르는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안나 자라드니 Anna Zaradny의 사운드 설치 작품은 관객을 전시장 곳곳으로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하며, 이동하는 공간에 따라 소리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와 함께 두 점의 영상 설치 작품도 선보이는데, 그중 한 작품은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공간에 설치되어 관객의 방향 감각을 흐트러뜨린다. 길을 잃은 듯한 낯선 경험을 통해 관객은 그 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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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잡 (울라 루친스카, 미하우 크니하우스), ⟨얽힘 II⟩, 2024, 스테인리스강, 아마실, 말린 엉겅퀴꽃
영성의 미로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한국의 정신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불교와 샤머니즘, 조상신에 대한 믿음이다. 오랫동안 억압받아온 이러한 문화적 유산은 최근 문화적 뿌리를 다시 돌아보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특히 예술계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폴란드 작가 우르슐라 브롤 Urszula Broll은 관객을 이러한 영성의 세계로 이끈다. 평생 불교를 공부해온 그는 회화를 일종의 명상으로 여겼다. 브롤의 작품과 나란히 소개되는 한국 작가 이수경의 연작은 전통 채색 기법을 활용해 비단 위에 그린 것으로, 불교 사상과 신앙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형상화한다. 이와 함께 한국의 전통적 영성을 또 다른 시각에서 보여주는 박생광의 작품도 전시된다. 1985년 세상을 떠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박생광은 한국의 무속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를 자신의 작품 세계에 적극적으로 담아냈다.
파울리나 올셰프스카는 불교와 샤머니즘적 요소를 전시에 담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통과의례가 특정 문화나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국 관객에게도 직관적으로 와닿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폴란드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전시를 이루는 각각의 설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통과의례가 된다. 시각과 청각, 촉각을 아우르는 감각적 경험이 쌓여 관객마다 저마다의 여정을 만들어내고,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변화의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하도록 이끈다.
전시 개막일인 9월 5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에는 안나 자라드니 Anna Zaradny의 퍼포먼스 ⟨하얀 미소 White Smile⟩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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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이동식 사원》 연작 중, 2024, 비단에 석채 / 사진: 김영태
1995년 처음 개최된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미술 비엔날레이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국제 미술 행사 가운데 하나다. 광주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이어가는 한편,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과 한국 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026년 제16회 광주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은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 출신 시각예술가 호 추 니엔 Ho Tzu Nyen이 맡았다. 올해는 본전시 외에도 25개의 국가 파빌리온이 관객을 맞는다.
폴란드 파빌리온은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올해로 세 번째 참가를 맞는다. 2023년에는 마리안나 돕코프스카 Marianna Dobkowska와 세바스티안 치호츠키 Sebastian Cichocki가 큐레이터를 맡았고, 2024년에는 파베우 야니츠키 Paweł Janicki가 WRO 아트센터 WRO Art Center와 협력해 폴란드 파빌리온을 선보였다.
저자: 우르슐라 야브원스카 Urszula Jabłońska (2026년 7월) | 번역: AL (2026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