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슐라 브롤은 20세기 후반 실롱스크 미술계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St-53과 오네이론 그룹의 공동 창립자이다. 1930년 3월 17일, 폴란드와 독일계 혈통을 지닌 실롱스크 가정의 세 딸 가운데 한 명으로 카토비체에서 태어났고, 2020년 2월 17일 카르코노셰산맥의 프셰시에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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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슐라 브롤 Urszula Broll은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새롭게 설립된 브로츠와프 국립조형예술학교 Państwowa Wyższa Szkoła Sztuk Plastycznych 카토비체 분교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 학교는 크라쿠프 미술아카데미의 분교로 편입되었고, 훗날 독립된 카토비체 국립미술원 ASP Katowice으로 발전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해 그는 선전 그래픽과 포스터를 전공했다.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 사이, 그는 훗날 폴란드를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가 되는 콘라트 스비나르스키 Konrad Swinarski를 만났다. 스비나르스키는 카토비체의 학생들에게 브와디스와프 스트셰민스키 Władysław Strzemiński의 예술 이론을 소개했고, 이를 계기로 교내에는 자발적인 연구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1953년 예술가 그룹 St-53으로 발전했다. 그룹 이름은 결성 연도와 장소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카토비체는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을 기리기 위해 한동안 '스탈리노그루트 Stalinogród'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에서 유래했다.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스트셰민스키는 이들의 예술적 탐구를 이끄는 비공식적인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브롤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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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콘크리트 위에, 어느새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작은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서방에서 몰래 들여온 인상주의 거장들의 작품 엽서를 경건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퇴폐적이라 비난받던 서구 문학을 이야기하며, 기타 선율에 실려 퍼지는 향수 어린 노래를 듣곤 했다."
그룹의 초기 전시는 매우 비공식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전시는 1953년 카토비체 인근 브라다 Brada의 한 개인 주택에서 열렸고, 이듬해에는 그룹 구성원인 마리아 '메리' 오브렘바 Maria 'Mary' Obremba의 카토비체 자택에서 두 번째 전시가 개최되었다.
브롤은 미술학교 시절 초기 작품에서 실롱스크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St-53이 결성된 1953년에 제작된 연작으로는 《실롱스크의 여인들 Kobiety śląskie》과 《늙은 실롱스크 여인 Stara Ślązaczka》 등이 있다. 특히 《늙은 실롱스크 여인》에서는 화면을 가득 메운 노파의 육중한 모습이 좁은 화면을 압도한다. 인물은 단순화되고 평면적으로 묘사되었으며, 노란색을 중심으로 한 절제된 색채가 사용되었다 이 작품에서 브롤은 형태와 공간을 구성하는 아카데믹한 규범은 물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에서도 벗어났다. 후기 인상주의적인 화면 구성과 짧은 붓질, 강렬한 색채는 학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준에서 벗어난 형식주의적 일탈이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경고를 받았다.
St-53 활동 초기부터 브롤의 작품은 섬세한 색채 감각으로 두드러졌다. 시인 율리안 프시보시 Julian Przyboś는 그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색채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단연 우르슐라 브롤이다. 그룹 구성원 가운데 오직 그만이 일부 작품을 오롯이 색채만으로 구축한다."
브롤은 자발적인 연구 모임에서 활동하며 예술적 탐구를 한 단계씩 심화해 나갔다. 그는 스트셰민스키의 이론을 바탕으로 아방가르드 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차례로 탐구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나갔다. 실롱스크 여성들을 그린 초상화에 이어 입체주의 양식의 회화 작품들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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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에 대해 토론하는 일은 St-53 그룹 활동의 핵심이었다. 구성원들은 분석적 입체주의와 종합적 입체주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 이 시기 브롤의 작품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선과 곡선의 격자로 형태를 해체한 화면과 프리즘처럼 분절된 정물화에서 출발해, 점차 평평한 색면으로 구성된 산업 풍경으로 점차 옮겨갔다.
St-53의 첫 공식 전시는 1956년 5월, 당시 여전히 스탈리노그루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카토비체의 실롱스크 연구소 Instytut Śląski 창작클럽 Klub Pracy Twórczej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그룹의 첫 공식 전시인 동시에 사실상 활동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롤은 바로 이 전시에서 훗날 남편이 되는 안제이 우르바노비치 Andrzej Urbanowicz를 만났다. 그는 이후 오네이론 Oneiron 그룹의 공동 창립자이자 카토비체 피아스토프스카 거리 1번지 다락 작업실을 함께 꾸려 나갈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브롤의 작품에는 우연성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감을 흘리거나 먹물을 입김으로 불어 퍼뜨리는 과정에서 형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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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영적 가르침을 다룬 서적들이 처음으로 폴란드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을 때, 제 앞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제 안에는 강한 긴장감이 맴돌았고, 종이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원과 삼각형, 사각형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성적인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채 직관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 몇 년 뒤 힌두 탄트라 미술 작품이 실린 책을 받아 보았을 때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기하학적 형태 안에 얼마나 많은 층위의 의미와 살아 있는 힘이 담겨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 온 직관이, 수천 년 동안 명상을 수행해 온 이들이 실천해 온 예술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브롤의 만다라는 이젤 회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불교 명상 수행의 일부는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동양의 만다라를 형식적으로 차용하거나 재해석한 작품도 아니다. 탄트라 불교를 수행한 브롤에게 만다라는 하나의 미술 양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수행의 길이었다. 그것은 조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위한 과정이었다. 브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제 작품들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실 제 작품은 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그립니다. [...] 고요함과 평온 속에서 만다라와 마주하고 제 자신의 경험을 들여다보며 마음의 균형을 되찾습니다."
이 시기 브롤은 인도의 신비주의와 도교, 선불교 철학, 탄트라를 깊이 탐구했으며,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의 저작을 폴란드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예술 활동과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회화 세계를 직접 형성한 중요한 토대였다. 따라서 브롤의 추상회화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깊이 품고 있으며, 최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힐마 아프 클린트 Hilma af Klint의 작품 세계와도 정신적으로 맞닿아 있다.
브롤의 만다라는 부드럽고 옅은 색조의 세로형 구성이 특징이다. 밝은 색조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이고 축을 중심으로 한 화면은 물질 회화의 거칠고 표현주의적인 작품들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시간이 흐르면서 캔버스에 유채 대신 종이에 수채를 사용하는 작업도 점차 늘어났다.
이처럼 브롤은 당시 폴란드 회화계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나갔다. 미술사가 카타지나 쿠하르스카 Katarzyna Kucharska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창작 행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브롤의 예술을 당국의 기대에 맞춰 만들어진 미술과 당시의 신아방가르드 미술 모두로부터 뚜렷이 구분 짓게 했다."
1970년대 초, 오네이론의 구성원들은 점차 개인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오네이론은 예술가 그룹의 성격을 넘어 폴란드 최초의 불교 공동체로 발전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브롤은 전시 활동을 다소 줄였지만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았다. 한편 브롤과 우르바노비치의 철학적·형이상학적 관심은 불교의 사상과 수행으로 더욱 깊이 향했고, 피아스토프스카 거리의 작업실은 폴란드 최초의 불교문화 거점이 되었다.
1974년 2월부터 브롤과 우르바노비치는 폴란드 인민공화국 최초의 불교 잡지 《길 Droga》을 발간했으며, 이후 잡지명은 《선의 길 Droga Zen》로 바뀌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불교 수행은 브롤의 삶에서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3년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불교 공동체를 따라 카토비체를 떠나 옐레니아구라 인근의 프셰시에카에 정착했다. 브롤은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도 그는 화가로서 꾸준히 활동하며 지역 예술계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그의 화업을 집대성한 전시는 미술사가 카타지나 쿠하르스카가 기획한 《아트만은 숨결을 뜻한다 Atman znaczy Oddech》로, 2020년 여름 바르샤바의 크룰리카르니아 Królikarnia에서 열렸다. 그러나 브롤은 끝내 전시 개막을 보지 못한 채 같은 해 2월 17일 프셰시에카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