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의 유리처럼 굳은 눈동자는 무엇을 보는가,
몸은 고요히 누워 있는 듯 보이는데
오직 눈만이 커다란 샘처럼
비스듬히 스며든 햇살을 받아
유리빛으로 반짝이며 그 위에 무지개가 드리운다 신비
시간과 빛이 서로 다투고
세상에 흩어지는 수많은 생각들과 맞부딪힌 채
박혀서 차갑게 움직임 없이 서 있다."
율리우시 스워바츠키 Juliusz Słowacki의 《영혼의 왕 Król Ducha》에 실린 이 잘 인용되지 않는 구절은 그제고시 코발스키 Grzegorz Kowalski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시신의 유리처럼 굳은 눈동자는 무엇을 보는가'라는 질문형의 시구를 동료 예술가들에게 던지기로 결심했다. 1970년대 이후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의 창작 방식이 되었고, 다른 예술가들을 자신의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자 교육적 전략이 되었다. 당시 그는 '다시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카메라 앞에서 동물이 되어보고 싶은가'와 같은 개인적 경험에 관한 질문들을 던졌다. 이번에는 한층 더 경계적인 질문을 선택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술적 응답들은 세 차례의 전시로 이어졌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의 먼 메아리로서《동물의 피라미드 Piramida zwierzą》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1993년, 이 조각의 작가 카타지나 코지라 Katarzyna Kozyra는 코발스키의 제자였으며, 《동물의 피라미드》는 바르샤바 국립미술원 조소과에서 제출한 그의 졸업 작품이었다.
네 마리의 동물이 차례로 위에 쌓여져 있다. 맨 아래에는 말이 있고, 그 위에 개, 개 위에 고양이, 그리고 가장 위에는 수탉이 올라가 있다.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서 차용한 이 이미지는 현실 속에서 구현되었다. 단, 하나의 전제가 있었다.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죽은 상태여야 했다.
코지라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은 한 마리뿐이었어요. 돈을 주고 산 그 말이었죠. 개는 아주 많아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어요.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죠. 전부 이미 부패가 시작된 상태였다는 점이에요. 결국 주인의 요청으로 불과 15분 전에 안락사된 개 한 마리를 받았어요. 고양이는 여섯 마리 정도 중에서 고를 수 있었고, 수탉은 두 마리를 직접 때려 죽였어요. 큰 게 나을지 작은 게 나을지 몰라서요. 고민도 했죠. 일관성을 지키려면 개와 고양이도 살아 있는 걸 사서 직접 죽였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감정 때문이었어요. 적어도 그때의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동물들은 작가가 선택하기 이전부터 이미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조각을 위해 그들의 사체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코지라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말, '카시아'의 죽음을 촬영했다. 그 영상 속 한 장면은 죽어가는 동물의 눈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시신의 유리처럼 굳은 눈동자는 무엇을 보는가'. 코지라의 관심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나 죽음의 체험 그 자체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상기시키고자 한 것은 죽음이 우리 삶 속에 이미 깊이 새겨져 있으며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이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지각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손에 의해 가해지는 죽음은 우리 대부분의 시선에서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맞아 도살되는 수백만 마리의 칠면조에 대해 언론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매년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대통령에게 '사면'받는 단 한 마리의 칠면조뿐이다. 문명은 스스로를 정화된 환상적 이미지로 그려내지만 동시에 자연과 동일한 법칙 아래 놓여 있다.
코지라는 《동물의 피라미드》를 작업하던 시기에 이 사실을 몸소 겪게 된다. 몸에서 암이 발견되었고 혹독한 치료 과정을 거쳤다. 말이 안락사되던 바로 그날, 마지막 항암 치료를 받았고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
"그저 파괴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시간을 연장하는 일일 뿐이라는 자각만이 남았어요.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중병에 걸렸고 예후도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 순간 제 의식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어요. 저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코지라는 아르투르 즈미예프스키 Artur Żmijewski에게 위와 같이 말했다.
이처럼 소모적인 병의 개인적 경험은 이후 작품《올림피아 Olimpia》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반면 《동물의 피라미드》에 대해 코지라는 이를 '물질의 천재적 변형을 기리는 기념비'라고 정의했다.
"말은 개와 고양이에게 먹혔고 그들은 다시 사료로 가공되어 돼지와 수탉의 먹이가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먹었죠. 그 말이 아니더라도 다른 말이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건 정말 천재적인 일이에요. 환생을 기리는 작업이죠."
환생. 결국 종말론적 질문은 다시 떠오른다.《동물의 피라미드》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미래, 사후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박제된 동물들이 암시하는 냉혹한 대답은 영혼의 지속을 전제로 하는 가톨릭적 개인 종말론과는 분명 충돌한다. 코지라는 말한다.
"모든 것은 비밀이에요. 상상 속 철학들, 그런 것들은 모두 명백하고도 정말로 중대한 사실, 파괴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저는 그걸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조화이고 저는 그 안에 아주 잘 참여하고 있어요."
이러한 기존 철학들과의 충돌은 작가를 향한 공격의 근저에 놓여 있었다. '조각가의 졸업장이냐, 동물 사체 처리업자의 자격증이냐'라는 질문이 나왔고, '이 길을 계속 가다 보면 문신이 새겨진 인간 피부로 만든 갓등 전시도 보게 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이어졌다. 한 독자는 우리 모두에 대한 모욕이라며 분노를 표했다. 어떤 이는 작가의 이름을 이니셜로 처리하며 마치 형사 사건의 피의자처럼 다루었다. 한편에서는 동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예술의 명예를 지킨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그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장식적이고 순응적인 예술인가.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멈춰 서서 문제를 직시하고 스스로의 입장을 취하며 나아가 그것을 재고하게 만드는 예술인가. 이러한 이유로 코지라는 '정신적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0년대 그의 작업은 누구도 무관심하게 두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코지라는 자신의 졸업작품을 위한 전단에 이렇게 적었다.
"동물로 만든 기념비, 피라미드라는 아이디어는 동물 박제 기술을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신 J. 린코프스키 J. Linkowski 씨와의 협업을 통해 실현되었다."
저자: 카롤 시엔키에비치 (2009년 12월) | 번역: AL (202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