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재능을 가진 쇼팽은 귀족들의 살롱에서 펼친 연주로 놀라움을 선사했고, 행운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쇼팽은 자선 단체의 음악회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사교활동 또한 활발히 했는데, 바르샤바의 여러 카페에서 젊은 문학가, 비평가, 음악가들과 교류했다. 그 카페 중 하나인 호노라트카 Honoratka는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같은 자리에서 얼마 전까지도 레스토랑으로 영업을 했었다.
1825-1826년에는 성모마리아 방문 수녀회 성당 Kościół Sióstr Wizytek 에서 주일마다 오르간을 연주했다. 특히 쇼팽은 성 십자가 성당 Kościół Św. Krzyża, 성 안나 성당 Kościół św. Anny에서도 연주했다. 1825에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사한 차르 알렉산드르 1세를 위해 아우구스부르크-루터파 교회 Kościół ewangelicko-augsburski 에서 에올리멜로디콘 eolimelodikon (역주: 오르간을 개량한 악기) 연주했다.
쇼팽은 크라신스키 광장의 국립 극장 Teatr Narodowy에 자주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주로 모차르트 Mozart, 로시니 Rossini, 스폰티니 Spontini, 보옐디유 Boieldieu 등의 오페라를 감상했고, 쿠르핀스키 Kurpiński, 엘스네르 Elsner가 작곡한 폴란드 오페라 작품들도 접하게 되었다. 1827년에는 피아니스트 마리아 시마노프스카 Maria Szymanowska를 비롯해 젊고 재능 있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에도 다니곤 했다. 1828년 봄에는 당시 유명했던 작곡가 후멜 Hummel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그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휴가
작곡가 쇼팽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 친구들의 가족들이 사는 영지로 떠난 여름 휴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쇼팽은 그곳에서 시골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젤라조바 볼라에도 머물렀던 기록이 몇 가지 남아있다. 1823년 여름, 그리고 누나 루드비카와 함께 1825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1826년 새해를 맞이했다. 폴란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1830년 여름 젤라조바 볼라를 방문했다. 아마도 피아노를 밖으로 내놓고 연주했을 것이다.
1824년 여름에는 샤파르니아 Szafarnia에 있는 학교 친구인 도미니크 지에바노프스키 Dominik Dziewanowski의 가족 영지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신문 《샤파르니아 소식지 Kurier Szafarski》를 발간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마을 소식이나 루머를 실었는데, 쇼팽 자신이 각운을 살려 작성했다. 유대인 민속 음악을 듣기도 하고, 민속 의례를 지켜보기도 했다.
그 이듬해에도 샤파르니아를 방문하였고, 토룬Toruń 또한 방문했다. 1826년에는 에밀리아가 요양차 루드비카 스카르베크와 함께 머무르고 있던 바트 라이네르츠 Bad Reinertz (지금의 폴란드 두슈니키-즈드루이 Duszniki-Zdrój)로 어머니와 함께 떠났고, 그곳에서 두 차례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 이듬해인 1827년 프워츠크 Płock 근교의 코발레프 Kowalew에 있는 즈보인스키 Zboiński 백작의 영지와 스치제프 Strzyżew의 대모님 댁에서 여름을 보냈다. 안토니 라지비우 Antoni Radziwiłł공작의 사냥 별장이 있는 안토닌 Antonin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라지비우 공작은 열정적인 음악가, 첼리스트이자 성악가, 그리고 작곡가였다. 공작은 쇼팽의 재능에 매혹되었다.
1828년에는 친구 콘스탄티 Konstanty 의 가족, 프루샤크 Pruszak가문이 살고 있는 산니키 Sanniki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쇼팽은 그곳에서 마조프셰 Mazowsze 지방의 민속 음악을 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좋은 피아노를 쓸 수 있게 되어 《피아노 삼중주》를 썼고, 《론도 C장조》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했다. 이때, 쇼팽은 이미 《마주르 형식의 론도》, 《폴로네즈》, 《마주르카》를 비롯한 여러 곡,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 op. 2》와 첫 번째 피아노 소나타 《소나타 c단조》를 작곡한 상태였다.
여행
1828년 가을, 쇼팽은 아버지 니콜라 쇼팽의 친구 펠릭스 야로츠키 Feliks Jarocki교수와 함께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에서 오페라 공연과, 헨델의 《성 세실리아 축일 성가 Caecilien-Ode》를 듣게 되었다. 이 곡은 당시 작품들과 음악적 전통에 대한 지식을 넓히게 해 주었다.
1829년 5월, 바르샤바에서 10회의 연주회를 가졌던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ò Paganini의 연주를 듣게 되었고, 그의 테크닉은 쇼팽에게 영감을 주었다. 음악학교 마지막 학년에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두 개의 작품 《크라코비악 풍의 론도 op. 14》, 《폴란드 주제에 의한 환상곡 op. 13》을 작곡했다. 학위를 마친 후 쇼팽은 지인들과 함께 빈으로 향했다. 빈으로 가는 길 크라쿠프 Kraków에 머무르며 도시와 근교를 구경했는데,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도서관 내 필사본 구역에 보존된 당시 방명록에는 쇼팽의 서명이 남아 있다. 쇼팽은 오래된 건물들에 감탄하며, 근교의 비엘리치카 Wieliczka, 오이추프 Ojców와 피에스코바 스카와 Pieskowa Skała에도 다녀왔다.
그 시기, 쇼팽의 아버지가 장관에게 요청한 아들의 유학 장학금 신청서가 반려되었다. 그로 인해 쇼팽은 빈에 짧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빈에서는 바르샤바에서 알게 된 빌헬름 W. 뷔르펠 Wilhelm W. Würfel의 지휘로 자신의 곡 《오페라 ‘돈 조반니’ 중 아리아 ‘자 우리 서로 손을 잡고’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를 연주하고, 즉흥 연주도 했다. 《변주곡 op. 2》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는데, 쇼팽 본인이 기록하기를, 오케스트라 소리를 듣지 않고 연주했다고 한다. 쇼팽의 즉흥 연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슬링거 Haslinger는 모두를 감탄하게 하고, 큰 관심을 끌어모은 《변주곡 op. 2》의 악보를 출판했다. 두 번째 무료 콘서트에서는 자신의 작품 《크라코비악 풍의 론도》와 《변주곡》을 연주했다. 빈에서 쇼팽은 음악가와 비평가들의 생기 넘치는 환경을 경험하고, 메율 Méhul, 마이어베어 Meyerbeer 등의 새로운 오페라도 몇 편 감상했다.
바르샤바로 돌아오는 길, 쇼팽은 프라하, 치에플리체 Cieplice 와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드레스덴에서는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원작의 연극《파우스트 Faust》를 관람했는데, 막간에는 슈포어 Spohr의 오페라 《파우스트》의 일부분이 연주되었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빈에서의 성공으로 들뜬 쇼팽은 열정적으로 그의 첫 피아노 협주곡인 《피아노 협주곡 f단조》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첫 연습곡, 왈츠를 쓰고 1830년에는 녹턴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 《피아노 협주곡 f단조》는 친구들만 모아 놓고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연주하였고, 이후 3월 17일에 국립극장에서 《폴란드 주제에 의한 환상곡》과 함께 연주했다. 3월 22일 다시 열린 연주 무대에서는 《크라코비악 풍의 론도》와 함께 연주되었다. "폴란드인들은 운명적으로 쇼팽을 선물 받았다. 게르만인들이 모차르트를 선물 받은 것처럼"이라고 굉장한 극찬을 받기도 하고, 일부 대담한 음악적 시도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았다. 쇼팽은 약간 상처를 받았지만, 조심스럽게 비판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협주곡 e단조를 쓰기 시작했다.
젊은 소프라노 콘스탄치야 그와트코프스카 Konstancja Gładkowska에 대한 감정이 싹트고 있던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소프라노 헨리에테 존타크 Henriette Sontag의 성악적 기술과 목소리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스테판 비트비츠키 Stefana Witwicki의 시집 《시골의 노래들 Piosnki sielskie》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7월에는 가장 친한 친구인 티투스 보이치에호프스키 Tytus Woyciechowski를 만나기 위해 포투진 Poturzyn에 갔다가, 젤라조바 볼라에서 나머지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고향 방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