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펠리아: 시골에서 온 뿌리, 도시에서 태어난 감각
사람들은 체펠리아가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산물이라고 말하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하며 폴란드인의 미적 취향을 형성해왔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손으로 그린 간판 아래, 체펠리아는 과연 무엇을 담고 있을까?
'체펠리아 Cepelia'는 '민속예술산업중앙기관 Centrala Przemysłu Ludowego i Artystycznego'의 약칭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브랜드의 성격이 로고에 반영된다면, 체펠리아의 로고는 자연스러움과 개성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기울어진 서체는 손글씨를 떠올리게 하고, 유제프 므로슈착 Józef Mroszczak이 디자인한 양식화된 수탉은 농촌 문화를 상징한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수탉 장식은 집 지붕과 교회 탑, 길가의 십자가 위에 올려지곤 했다. 동시에 이는 다산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체펠리아가 보여준 '풍요로움'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이 수탉이 폴란드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온 사상과 전통, 그리고 이를 제도화하려는 흐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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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에서 산업으로
그 출발점은 폴란드 시인 치프리안 노르비트 Cyprian Norwid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체펠리아 초대 대표 조피아 시드워프스카 Zofia Szydłowska는 말한다. 그는 《프로메티디온 Promethidion》에서 ‘민속적 영감을 인류 전체를 관통하고 포괄하는 힘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썼다. 타트리 Tatry 산맥 포드할레 지역의 전통을 바탕으로 ‘민족 예술’을 제시한 인물은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에비치 Stanisław Witkiewicz였고, 농촌의 다채로운 색채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이는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 Stanisław Wyspiański였다. 한편, 민속 조각의 강한 표현성과 유리화 회화는 '포르미스트 Formist'에 의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이제 제도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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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장식산업미술박람회 폴란드관 전시 중, 조각가 얀 슈쳅코프스키 Jan Szczepkowski 교수가 설계한 예배당 / 사진: 폴란드 국립디지털아카이브 Narodowe Archiwum Cyfrowe N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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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에서 영감을 받아 응용미술과 공예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크라쿠프 예술·공예 집단 ‘바르슈타티 크라코프스키에 Warsztaty Krakowskie’와 이후 바르샤바에서 설립된 협동조합 ‘와드 Ład’였다. 전자는 1913년에 설립되었고, 후자는 이 조직이 해체된 뒤인 1926년에 새롭게 출범했다. 두 단체 모두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장인들을 한데 모은 조직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1925년 파리 전시에서 폴란드관이 거둔 성공 역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 알렉산데르 야츠코프스키 Aleksander Jackowski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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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통된 흐름은 전시 전반에 걸쳐 분명하게 드러났다. 유제프 차이코프스키 Józef Czajkowski가 설계한 파빌리온에서부터, 조피아 스트리옌스카 Zofia Stryjeńska의 대형 패널, 얀 슈쳅코프스키 Jan Szczepkowski가 밝은 목재로 만든 제단, 자코파네 목공예 학교 학생들이 깎은 인물상, 그리고 안토니 부셱 Antoni Buszek의 지도 아래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제작한 바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지나치게 민속적이다'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폴란드 예술가들은 결국 가장 많은 상을 받고 귀국했다. 그러나 이 성공에는 씁쓸한 이면도 있었다. 전쟁은 관련 기관들을 파괴했고, 문화적 변화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도시적 세련됨에 대한 선호가 커지는 사이 농촌은 점점 비어갔고, 전통적인 직업들도 사라져갔다. 민속 창작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를 보호하고 뒷받침할 필요가 있었다. 노동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며, 이를 받아들일 시장을 형성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제는 결국 국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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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비트키에비치 Stanisław Witkiewicz가 디자인한 커피·차 세트 일부 / 크라쿠프 인근 뎅브니키 Dębniki에 위치한 유제프 니에치비에츠키 도자기·타일 공장 Fabryka Pieców i Fajansu Józefa Niedźwieckiego에서 제작 (약 1902년) / 개인 소장 / 사진: Michał Ko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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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isław Witkiewicz, Parte de um conjunto para café e chá, produzido na Fábrica de Fogões Azulejados de Józef Niedźwiecki e Cia em Dębniki, nos arredores de Kraków, ca. 1902, coleção privada, Fot.: Michał Korta
1949년 6월 21일, 각료회의 경제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협동조합과 국가가 결합된 형태의 민속예술산업중앙기관 '체펠리아'가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한편으로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주체였으며, 동시에 권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체펠리아는 빠르게 세를 넓혀 갔다. 폴란드 주요 도시에 지역 생산을 감독하는 지부가 설치되었고, 새로운 생산 시설이 들어섰으며, 노동 인력 양성도 이루어졌다. 또한 다른 민속 및 예술 산업 협동조합들을 점차 흡수해 나갔는데(그중에는 재건된 '와드'도 포함된다), 생산 부문에만 수만 명이 고용되었고, 수공예 종사자는 약 2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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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펠리아 초대 대표 조피아 시드워프스카 / 사진: 체펠리아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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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펠리아를 만든 사람들을 '열정적이었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조피아 시드워프스카는 미술사학자이자 타고난 기획자이며, 자신감 넘치는 성격에 뛰어난 미모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경영진 자리에 오른 여성 가운데 한 명이었고, 경제 분야에서 실질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농촌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민속 수공예품의 수집과 판매를 담당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나의 꿈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52년 9월, 시드워프스카는 국가에 해를 끼쳤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2년 뒤 무죄가 인정되었고, 다시 체펠리아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대표가 아닌 부대표였다. 이후에는 운영보다는 내용적인 문제에 더 집중했다. 이미 1949년, 민속예술 전문가를 문화부에서 중앙기관으로 영입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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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혼자서 해내야 한다. 전쟁 전처럼."
시드워프스카는 민속예술 부서 조직을 맡아보라고 제안했을 때, 야니나 오린지나 Janina Orynżyna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회화에 대한 애정은 고향 빌뉴스에서부터 길러졌고, 글쓰기에도 재능을 보였다. 수공예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민족학자 에우게니우시 프란코프스키 Eugeniusz Frankowski 교수를 본받아 '잠재 협력 인물 명단', 즉 훗날 함께 일하게 될 이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그의 일기에 적혀 있듯, 학위는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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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단에 오르기 위해서는 열정과 세련된 미적 감각, 성과에 대한 갈망, 현장 활동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 됨됨이가 필요했다."
체펠리아에서 일하고자 했던 타데우시 비엥츠코프스키 Tadeusz Więckowski는 동시에 비밀경찰의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지방 조직을 구축하는 임무를 맡은 그는 협동조합 '와드'를 선택해 새로운 질서를 도입했다. 17년이 지난 뒤, 조직은 매우 안정된 상태에 이르렀고 이는 체펠리아를 위한 기반이 되었다. 타데우시 비엥츠코프스키는 조피아 시드워프스카와 스타니스와프 스트로인스키 Stanisław Stroiński에 이어 세 번째 대표로 취임했다. 그는 민속예술을 지키기 위해 산업화를 선택했고, 이를 두고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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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예술선전연구소 Instytut Propagandy Sztuki에서 열린 《실내 디자인과 자수의 예술 Sztuka Wnętrza i Sztuka Hafciarska》 전시 / 1936년 2월 / 주최: 시각예술가 협동조합 '와드' / 사진: 폴란드 국립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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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미술가, 민족지학자, 생산자, 경제 전문가, 기획자들이 하나의 연합을 이루었다. 어떤 이들은 디자인을 맡고, 다른 이들은 그 도안을 승인했다. 경험과 상상력이 결합된 협업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체펠리아 가족'이라 불렀고, 그 구성은 세 세대에 걸쳐 이어졌다. 그중에는 양털 깎는 가위로 섬세한 '파옝키 pajęki'를 만들어낸 체시아 코놉쿠프나 Czesia Konopkówna도 있었고, 협동조합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스타니스와프 라이흐 Stanisław Reich도 있었다. 회계 사무실 창가에는 늦은 밤까지 불이 켜져 있곤 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비전을 지닌 인물들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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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바르샤바 체펠리아 매장에서 상품을 살펴보는 여성 고객 / 사진: Andrzej Wiernicki /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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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분명했다. 체펠리아는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사회주의 사회 형성에 기여하며, 민속 및 예술 수공예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정관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의 잡지들, 이를테면 《렝코지에워 아르티스티츠네 Rękodzieło Artystyczne 수공예》나 《스톨리차 Stolica 수도》를 보면, 농촌 예술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논의뿐 아니라 생활에 밀착된 실용적인 조언들도 함께 실려 있었다. 집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도 그중 하나였다. 《체펠리아와 함께하는 집 Z Cepelią w domu》이라는 소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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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겨울이 충분히 길어 주변의 회색빛과 햇빛의 부재를 절실히 느끼게 되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체펠리아에서 고른 다채로운 물건들이 우리 집을 밝고 기능적인 공간으로 꾸미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소시민적 미학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옛것과 새것을 함께 두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무지개빛 직물은 실내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손으로 만든 소품들은 공간에 개성을 더했다. 가능한 한 많은 독창적인 작품을, 그것도 우리 폴란드의 것으로. 가구는 모듈형으로, 세트 구성은 피할 것. 대칭, 조화, 비례. 그리고 무엇보다 안락함, 무엇보다 안락함이 중요했다.
체펠리아는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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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체펠리아 파빌리온 개관 / 사진: Dionizy Gładysz / 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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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평범한 시민에게는 그런 물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았다. 짚으로 만든 제품조차 사치세가 부과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설령 체펠리아 라벨이 붙은 식탁보나 카펫을 갖고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업과 국가가 규정한 '좋은 취향'을 지닌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모범적인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민의 집에는 자코파네에서 제작된 유제프 쿨론 Józef Kulon의 목재 가구, 아니면 적어도 등나무 가구 정도는 있어야 했다. 쿠르피에풍 의자와 안락의자는 짚으로 채워져 있거나, 최소한 줄무늬 직물로 덮여 있었고, 카슈비아 자수가 놓인 테이블보는 포트할레식이나 실롱스크식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 아래에는 이중 직조 카펫이 깔렸는데, 이 기법을 완벽하게 구사한 인물이 엘레오노라 플루틴스카 Eleonora Plutyńska였다.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걸렸으며, 특히 가우코프스키 부부의 작품이 선호되었다. 체펠리아 직물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중앙기관을 위해 훗날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마그달레나 아바카노비치 Magdalena Abakanowicz도 작업에 참여했다.
이 밖에도 크시슈토프 헤니시 Krzysztof Henisz나 브로니스와프 볼라닌 Bronisław Wolanin의 도자기, 마리아 부야코바 Maria Bujakowa의 킬림, 목제 장난감, 짚으로 만든 매트 등이 권장되었다. 각각 완성도, 문양, 독창성, 가격 면에서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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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제 장난감 예술 공예품 (1947년) / 사진: 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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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더 공들여 꾸며진 곳은 국가 기관의 대표 공간들이었다. 문화과학궁전, 국가평의회, 국회, 국립 필하모니 등 주요 기관의 내부 공간은 물론, 체펠리아 매장의 쇼윈도와 구시가지 광장에 자리한 민속예술의 집 Dom Sztuki Ludowej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곳은 수도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로 여겨졌다. 오린지나는 이렇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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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를 방문한 외국인이라면, 민속 종이 공예나 자수 하나쯤은 반드시 챙겨 돌아갔다."
미국도 인정한 체펠리아
폴란드에서는 체펠리아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렸지만, 해외에서는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수출에서는 등나무 제품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는데, 1951년에는 전체 수출의 거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 뒤를 킬림과 태피스트리가 이었고, 목공 소품과 가구가 근소한 차이로 뒤따랐다. 이어 가죽 제품이 자리했고, 그 다음으로 호박 공예품, 도자기, 자수, 레이스가 뒤를 이었다.
구매국도 다양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주요 시장이었고, 그 범위는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까지 확장되었다. 폴란드 수공예에 대한 꾸준한 수요와 법적 규제로 인해 체펠리아는 중개업자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관계가 항상 순조롭지는 않았다. 결국 자체 해외 무역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58년 브뤼셀에 폴란드 민속예술을 소개하는 첫 매장이 문을 열었다.
오린지나는 자신의 일기장에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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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재무장관은 수도에 이렇게 아름다운 상점을 열어준 데 대해 폴란드 대사에게 축하를 전했고, 쇼팽의 조국에 애정을 지니고 있던 엘리자베스 여왕도 수행단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로그리에 광장 Place Rogier 10번지의 매장에서는 물건들이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자파스키 zapaski'라 불리는 양모 앞치마는 여성들의 이브닝 스커트로 활용되었고, 자코파네식 숟가락 걸이 '위슈니키 łyżniki'도 큰 인기를 끌었다. 짚과 등나무로 만든 그릇도 꾸준히 팔려 나갔으며, 포드할레 도자기는 소쿠우카 Sokółka산 카펫 위에 진열되었다. 첫 재무 보고서는 적지 않은 만족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년 뒤에는 또 하나의 매장이 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뉴욕, 그것도 더없이 좋은 입지인 5번가였다. 상품 구성은 브뤼셀 매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서비스는 매우 정중하고 품격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각가 안토니 카민스키 Antoni Kamiński는 개점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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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은 사람들로 붐볐고, 《뉴욕 타임스》는 이를 매우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이곳은 뉴욕에서 손꼽히는 매장으로 평가되었고, 상품 역시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폴란드인 방문객은 많지 않았지만, 상류층 미국인들은 몰려들었다. 그들은 따뜻하게 반응하며, 이렇게 색다르면서도 수준 높은 상점이 생긴 데 대해 자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매장의 분위기는 매우 품격 있었고, 그 덕분에 평소에는 좀처럼 그렇지 않은 미국인들조차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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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버ㅏ 콘스티투치야 광장 Plac Konstytucji 5번지에 위치했던 체펠리아 대표 매장 내 어린이 놀이방 / 사진: Jerzy Baranowski / 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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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에는 또 하나의 매장이 문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뉴욕, 그것도 더없이 좋은 입지인 5번가였다. 상품 구성은 브뤼셀 매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서비스는 매우 정중하고 품격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각가 안토니 카민스키 Antoni Kamiński는 개점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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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은 사람들로 붐볐고, 《뉴욕 타임스》는 이를 매우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이곳은 뉴욕에서 손꼽히는 매장으로 평가되었고, 상품 역시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폴란드인 방문객은 많지 않았지만, 상류층 미국인들은 몰려들었다. 그들은 따뜻하게 반응하며, 이렇게 색다르면서도 수준 높은 상점이 생긴 데 대해 자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매장의 분위기는 매우 품격 있었고, 그 덕분에 평소에는 좀처럼 그렇지 않은 미국인들조차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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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기념품 / 사진: Krzysztof Zuczkowski /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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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평가는 유럽과 미국에 있던 나머지 다섯 개 체펠리아 매장의 고객들 사이에서도 공유되었다. 그러나 이런 호평이 곧 수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매장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폴란드 교민 사회와의 협력, 그리고 세계 각지의 예술 중심지에서 열린 민속 작가들의 전시는 재정적 성과보다는 폴란드 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데 더 크게 기여했다. 애초에 그것이 체펠리아의 주된 역할이기도 했다.
선전의 도구가 된 수공예
체펠리아가 해외 시장에서 선전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결코 숨겨진 적이 없다. 국내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대중 매체 활용에서부터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 자체 간행물 발행과 영화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이 사용되었고, 저명한 민족지학자와 미술사학자들이 참여하는 심포지엄도 열렸다. 화려한 색상의 소책자와 포스터, 달력도 제작되었다.
또한 1971년은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바르샤바의 데필라트 광장 Plac Defilad에서는 체펠리아가 개최한 행사인 '체펠리아다 Cepeliada'가 최초로 열렸다. 자수, 목각, 의례용 빵 제작 시연과 수공예품 판매, 지역 민속 공연이 어우러진 이 축제는 이후 수도 바르샤바를 넘어 다른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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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중앙광장에서 열린 국제민속예술박람회 / 사진: Jacek Bednarczyk / 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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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기관의 공로도 몇 가지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민속 예술가들을 위한 공모전을 열고 장학금을 지원한 점, 어린이 발달에서 장난감의 역할을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에 분석한 장난감 산업 연구·설계 사무국을 설립한 점, 그리고 유네스코 산하 세계수공예협의회 World Crafts Council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대표적이다.
'체펠리아'라는 이름의 열차는 초반에는 순조롭게 운행되며 빠르게 속도를 높여갔다. 1954년 구조조정 시기에 잠시 속도가 늦춰지기도 했지만, 보다 정비된 조직 체계가 이를 보완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이 시기 명칭에서 '산업'이 '수공예'로 바뀌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시 급격히 가속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예술과 생산 사이의 이해 충돌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제품의 질이 떨어지며 점차 일상화되었고, 몇몇 주요 기관도 해체되었다. 여기에 더해 폴란드는 점차 서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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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 중앙광장에서 열린 제39회 국제민속예술박람회 / 사진: Michał Lepecki / 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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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펠리아는 설립된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이던 1990년에 해체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조직들이 만들어졌고, 현재는 재단이자 기업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다만 과거의 모습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상태다.
어떤 이들은 이를 '키치'라 부르고, 또 다른 이들은 '걸작'이라 반박한다. 오늘날 체펠리아는 대체로 향수를 담아 회상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펠리아가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영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과거를 본보기로
폴란드의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치난카를 새롭게 해석한다. 카타지나 크미타 Katarzyna Kmita는 혼자 종이를 오려 작업하고, 마그달레나 루빈스카 Magdalena Lubińska는 협업을 통해 비치난카 형태의 러그를 만든다. 한편 스튜디오 WWAA의 창립자들은 보이치에흐 카코프스키 Wojciech Kakowski와 함께 팀을 이루어 비치난카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을 선보였다. 사용하는 도구도 서로 다르다. 크미타는 칼을, 나머지는 레이저를 활용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이들은 전통과 현대를 결합하며, 비치난카로 오늘날의 폴란드를 새롭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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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지나 크미타 《플로리다 해변》 (2004) / 사진: 작가 제공 / 《모호헤이! 디아》 러그 / 디자인: 마그달레나 루빈스카, 미하우 코파니신 / 사진: 디자이너 제공 / 상하이 엑스포 EXPO 2010 폴란드관 프로젝트 / 사진: 홍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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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미타를 사로잡은 것은 색채와 독창성, 그리고 수작업의 감각이었다. 브로츠와프 국립미술원을 졸업한 그는 종이 오리기 기술을 스스로 익혔다. 기존 문양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변형하고 재해석하며, 이러한 태도는 대중문화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만화 캐릭터, 코카콜라 병, 유명 자동차 브랜드의 로고, 휴대전화와 같은 현대의 이미지를 워비치풍 비치난카 문양 속에 끌어들여 검은 배경 위에 구성하고, 이를 통해 1989년 이후 폴란드의 미적 변화를 해석한다. 크미타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큰 규모가 특징이며, 지름이 최대 1.5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마그달레나 루빈스카가 모호 디자인 Moho Design에서 작업한 비치난카 형태의 '모호헤이! 디아 Mohohej! DIA' 러그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제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2005년 《월페이퍼 Wallpaper》 매거진 상을 받았고, 3년 뒤에는 '디자인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Red Dot: Design Award를 수상했다. 시작은 의외였다. 루빈스카는 아이를 위한 카펫을 찾다가 폴란드 산악 지역 주민 구랄 Góral의 전통 의상 바지에 쓰이는 모직 직물을 발견했고, 이를 생산하던 공장과 연결되었다. 이 소재의 가능성에 주목한 그는 미하우 코파니신 Michał Kopaniszyn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디자이너들은 모직 천을 여러 겹으로 보강한 뒤, 비치난카를 연상시키는 문양을 카펫에 잘라 넣었다.
과거를 참조한 또 다른 사례는 2010년 상하이 엑스포 EXPO 2010에서 선보인 폴란드관이다. 건물의 형태는 여러 번 접힌 종이를 연상시키며, 표면은 비치난카 문양으로 덮여 있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이러한 민속적 모티프를 한층 강조한다. 전통적인 미적 코드가 현대 건축의 언어로 옮겨진 것이다.
21세기에도 민속 예술은 여전히 폴란드를 대표하는 얼굴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예전보다 더 아름다운 방식으로 말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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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야츠코프스키 Aleksander Jackowski | 《체펠리아. 전통과 현대 Cepelia. Tradycja i nowoczesność》 | 1999년 |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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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트르 코르두바 Piotr Korduba | 《민속의 상품화 Ludowość na sprzedaż》 | 2013년 |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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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나 오린지나 Janina Orynżyna | 《민속 예술을 위하여. 작업의 기록 O sztukę ludową. Pamiętnik pracy》 | 1965년 |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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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데우시 비엥츠코프스키 Tadeusz Więckowski | 《사라져가는 아름다움 Ginące piękno》 | 1987년 | 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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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고드니크 포브셰흐니 Tygodnik Powszech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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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치포스폴리타 Rzeczpospolita》
저자: 아그니에슈카 바른케 Agnieszka Warnke | 편집 & 번역: AL (2026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