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독립을 이끈 여성들
비밀 교육을 조직한 활동가들, 외교관들,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남성으로 변장한 채 전선에 나선 여성 병사들. 분할 통치 시기, 조국의 독립과 여성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동시에 싸워야 했던 이들. 오늘날 점차 우리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는 그 영웅들을 만나보자.
19세기 사람들의 상상력과 시대적 표상을 지배한 것은 '폴란드의 어머니 Matka Polki'라는 형상이었다. 이 이미지는 훗날 병사가 될 아들들을 돌보는 보호자이자, 전쟁에 나가거나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은 아버지들이 남긴 빈자리를 묵묵히 떠맡는 존재로 그려졌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한편으로는 폴란드 여성을 숭고한 인물로 격상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공적 영역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20세기 폴란드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마리아 동브로프스카 Maria Dąbrowska는 이러한 전형적인 성 역할 구도 속에서 사회적 비극이 '정주한 삶의 상징인 여성'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방랑자이자 길을 여는 남편' 사이에서 펼쳐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 마주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도에 의문을 던지듯, 작가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여성 투사와 방랑하는 여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물론, 그런 세계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이를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분할 통치 당국이었다. 그들은 폴란드 여성들을 경계하며 두려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월 봉기 당시 러시아의 평론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베르크 Nikolai Vasilyevich Berg는 "폴란드 여성은 늘 무자비하고, 고질적인 음모가다"라고까지 주장했다. 또한 11월 봉기 직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이반 파스케비치 Ivan Paskevich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적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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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폴란드 여성들이 두렵다! 이 악마 같은 민족은 언제나 여성들을 앞세워 움직여왔다 [...]."
여성들이 독립과 폴란드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벌인 투쟁은 여러 층위에서 전개되었다. 비밀 교육을 조직하고, 해외에서 문화 외교 활동을 펼치며, 비밀 결사와 무장 투쟁에 가담하는 등 그 방식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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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폴란드 여성 연맹 Liga Kobiet Polskich / 사진 속 인물: 브와디스와프 반두르스키 Władysław Bandurski, 마리아 피우수츠카 Maria Piłsudska, 조피아 안나 모라체프스카 Zofia Anna Moraczewska / 사진: 국립도서관 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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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러한 활동과 더불어 폴란드에서는 여성 해방 운동도 점차 확산되어 갔다. 여성 활동가들 역시 앞서 언급한 여러 영역에서 활발히 움직였다. 그러나 여성 단체들은 '평등권'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다룬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나라 전체가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판을 피하기 위해 여성 단체들은 자신들의 애국심과 폴란드 독립에 대한 헌신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점차 독립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고, 자유로운 폴란드가 세워지면 평등권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체칠리아 발레프스카 Cecylia Walewska는 저서 《우리의 여성 투사들 Nasze bojownice》(1935)에서 이렇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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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뒤에는 분명한 흔적이 남았다. 그것은 단지 평등권을 위한 투쟁의 자취만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가장 성스럽고도 소중한 가치, 곧 분할 통치 세력이 노리고 있던 폴란드 민중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흔적이기도 했다.
우리 여성 투사들의 역사는 긴장과 에너지로 맥박치던, 가장 사회적인 실천의 역사였다. 비록 개인이 감당한 활동이었지만, 그들에게 공적인 대의는 개인적 목표와 욕망을 모두 포괄할 만큼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다. 여성 해방의 이념은 민족 해방을 향한 열망, 조국을 위해 기꺼이 감수한 깊은 애국의 열정과 희생, 그리고 지하에서 끊임없이 등불을 들고 이어가던 실천과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 두 이상이 이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었기에, 여성 해방이라는 구호는 종종, 어쩌면 가장 자주, 다른 금지된 활동을 감추는 보호막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Author
- 체칠리아 발레프스카 《우리의 여성 투사들》(1935)
이제 그 영웅들 가운데 몇몇 인물을 통해, 분할 통치 아래에서 폴란드 여성들이 선택했던 다양한 행동 전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모드제예프스카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한 폴란드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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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역의 헬레나 모드제예프스카(1980) / 사진: Jan Mieczkowski / 폴란드 국립도서관 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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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잃은 사회,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족으로서의 존재마저 지워지려 했던' 폴란드인들에게 있어 해외에서 폴란드와 관련된 인물이 두각을 드러내는 일, 폴란드를 향한 우호적인 언급이나 작은 연대의 몸짓 하나하나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렇기에 국제 무대에서 활동한 폴란드 문화의 여성 대사들의 역할 또한 결코 작지 않았다.
엘리자 오제슈코바 Eliza Orzeszkowa는 평생 대부분을 그로드노 Grodno(현 벨라루스 흐로드나)에서 보냈지만, 영국에서 출간된 《유럽의 여성들에 대하여 O kobietach w Europie》에 폴란드 여성의 현실을 다룬 장을 집필해 국제 독자들에게 폴란드의 상황을 알렸다. 오늘날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 마리아 셸리가 Maria Szeliga는 파리에 거주하며 국제 여성 및 평화주의 단체에서 러시아화와 독일화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고, 독일어 수업 강요에 맞서 일어난 브제시니아 Września 학생들의 수업 거부 운동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마리아 코노프니츠카 Maria Konopnicka와 마리아 둘렝비안카 Maria Dulębianka도 이와 유사한 저항 활동을 함께 이끌었다.
소프라노 가수 유제피나 레슈케 Józefina Reszke는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공연 수입을 국내의 애국 활동을 지원하는 데 바쳤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진 인물은 헬레나 모드제예프스카 Helena Modrzejewska였다. 그는 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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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았지만, 우리의 재능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 [...] 우리는 그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해외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폴란드 배우가 영국과 미국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포들에게는 큰 자부심이 되었지만, 모드제예프스카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특히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여성 대회에서의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참석하지 못한 다른 발표자를 대신해 폴란드 여성 단체들의 발전 상황을 소개할 예정이었고, 연설의 서두에서 이렇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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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모든 일이 비밀리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동포 여성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자칫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거듭 터져 나온 열렬한 박수로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이 연설 이후 그는 '폴란드 세 분할 지역을 대표하는 대사'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의 발표문 번역본은 필사되어 세 지역을 오가며 널리 퍼져 나갔다.
모드제예프스카의 이러한 활동은 국내 당국의 감시를 피하지 못했다. 먼저 칼리시 Kalisz에서 예정되어 있던 폴란드 정치범을 위한 자선 공연 출연이 불허되었다. 이어 러시아 제국 영토에 대한 평생 입국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바르샤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계획되었던 공연도 취소되었다. 그는 《더 드라마틱 미러 The Dramatic Mirror》잡지에 실린 〈모드제예프스카와 차르의 폭정 Modrzejewska i carska tyrania〉라는 글을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비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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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우스운 일이죠! 거대한 러시아 제국이 모제예프스카를 두려워하다니! 과연 제가 그토록 대단한 인물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하네요!"
그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분할 통치 아래에서 폴란드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박해를 전했다. 한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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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러시아령 폴란드에 머물지 않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남편은 시베리아로 보내졌을 것이고 [...], 저는 아마 어린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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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나웽추프 Nałęczów의 루블린 교육보급협회 '시비아트워 Światło' 회원들 / 사진 속 인물: 파우스티나 모지츠카, 스테판 제롬스키, 구스타프 다니워프스키 Gustaw Daniłowski, 프셰미스와프 루츠키 Przemysław Rudzki, 헬레나 둘렝바 Helena Dulęba, 카지미에시 둘렝바 Kazimierz Dulęba, 펠리차 술코프스카 Felicja Sulkowska / 사진: 폴란드 국립도서관 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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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 가운데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영역 중 하나는 폴란드어로 이루어지는 비밀 교육의 조직이었다. 활동가들은 무엇보다 교육 기회가 가장 제한되어 있던 계층, 곧 여성과 민중 계층을 위해 이러한 비밀 교육을 조직했다.
1879년 유제파 보야노프스카 Józefa Bojanowska는 바르샤바에 불법 '여성 학술 독서실 Czytelnia Naukowa dla Kobiet'을 설립했는데, 이는 여성들을 위한 비공식 고등 교육의 선구적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야기에워 대학교에 최초의 여학생이 입학한 것은 1896년으로, 크라쿠프 여성 해방 운동가들의 오랜 캠페인이 결실을 맺은 결과였다. 반면 바르샤바 대학교가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한 것은 훨씬 뒤인 1915년의 일이었다.
1882년 바르샤바에서는 야드비가 슈차빈스카-다비도바 Jadwiga Szczawińska-Dawidowa의 주도로 여성들을 위한 비밀 대학, 이른바 '비행 대학교 Uniwersytet Latający'가 설립되었다. 강의 장소를 자주 옮겨야 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Maria Skłodowska-Curie와 인류학자 마리아 차플리츠카 Maria Czaplicka처럼 훗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학자들도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이후 비밀 교육과 여성 해방 운동의 중추가 될 파울리나 쿠찰스카-라인슈미트 Paulina Kuczalska-Reinschmidt, 스테파니아 셈포워프스카 Stefania Sempołowska, 마리아 브이스워호바 Maria Wysłouchowa, 조피아 다신스카-골린스카 Zofia Daszyńska-Golińska 등 많은 여성들 역시 이곳에서 수학했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강의를 맡아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졌고, 비행 대학교의 수강생들은 6년간의 과정을 마친 뒤 이른바 '지하 졸업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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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아 셈포워프스카(1905) / 사진: Piotr Mecik /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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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적 가치와 애국적 이상은 농촌에서 활동하던 교육 운동가들의 지향점이었다. 그들은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는 동시에, 자신을 단지 '이 지역 사람'이라 여기던 농민들을 폴란드 문화와 긴밀히 연결하고자 했다. 그 가운데 가장 활발히 활동한 단체 중 하나가 '여성 민중교육회 Kobiece Koło Oświaty Ludowej'로, 다음과 같은 목표를 내세웠다.
- 도시 민중의 민족적·사회적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비밀 강좌를 열고, 가능한 곳에서는 공개 강좌도 운영한다.
- 가능한 한 많은 농민이 읽는 법을 익히도록 초급 교재를 보급하여, 이를 통해 스스로 삶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한다.
- 알맞은 도서를 제공해 민중이 독서 능력을 더욱 다지고 지식을 넓혀 갈 수 있도록 한다.
- 농촌에 상점과 술을 팔지 않는 교류 공간을 세워 민중을 돕는 한편, 그들과 더욱 긴밀히 접촉할 수 있도록 한다.
민중 계몽 활동가들은 농촌에 도서관을 세우는 한편, 학습에 필요한 교재와 보조 자료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스테판 제롬스키 Stefan Żeromski의 소설 《강인한 여인 Siłaczka》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파우스티나 모지츠카 Faustyna Morzycka는 (저자들의 동의를 얻어) 유제프 이그나치 크라셰프스키 Józef Ignacy Kraszewski, 엘리자 오제슈코바, 볼레스와프 프루스 Bolesław Prus 등의 작품을 보다 쉬운 언어로 풀어 쓴 간략본을 마련했다. 훗날 사회교육학의 창시자가 되는 헬레나 라들린스카 Helena Radlińska 또한 《미츠키에비치는 누구였는가 Kto to był Mickiewicz?》와 같은 대중 교양 소책자를 집필했다.
1901년, 러시아 당국이 러시아령 폴란드 '콩그레수프카 Kongresówka'의 독서 수준을 조사하기 위해 설치한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비밀 교육의 영향은 전국 인구의 33%에까지 미쳤으며, 대다수 농민이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도 바로 그 비밀 교육 덕분이었다.
여성들은 수감자와 유형자들을 돕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스테파니아 셈포워프스카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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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민족의 삶에서도 감옥이 폴란드에서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한 세기 반에 걸쳐, 폴란드에서 조국의 자유를 위해 살아가며 일한 이들은 길고 짧은 차이는 있었지만 누구나 한때 감옥의 벽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감옥의 독방은 독립과 민주주의 사상이 태어나고 또 사라지던 요람이자 무덤이었습니다. 분할 이후 우리의 삶은 감옥이라는 이름을 하나의 명예로운 상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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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 크라헬스카 Wanda Krahelska / 러시아 아트 콜렉티브 슈토 젤라치 Chto Delat의 전시 《부정을 부정하다 Zanegować negacje》 출품작 / 브로츠와프 BWA 현대미술관 '아방가르다 Awangarda' / 이 콜렉티브는 사회·정치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창작을 지향하며, 지배적인 정치 체제에 맞서는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 사진: Bartłomiej Kudowicz /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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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교육에 헌신하던 바로 그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억압적인 체제를 직접 겨냥하는 급진적 행동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루드빅 바린스키 Ludwik Waryński가 이끈 제1 프롤레타리아트 I Proletariat 지도부에는 교사 출신 여성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라 옌티수프나 Aleksandra Jentysówna, 필리피나 프와스코비츠카 Filipina Płaskowicka(폴란드에서 최초의 농촌 부인회 Koło Gospodyń Wiejskich를 창설한 인물), 마리아 보후셰비추브나 Maria Bohuszewiczówna(대규모 체포 이후 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폴란드 사회당 PPS 시기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여성 활동가들은 무장 투쟁은 물론, 당의 비밀 활동 전반에 적극 가담했다.
파우스티나 모지츠카는 러시아의 우토프 Uthoff 장군을 겨냥한 암살 시도에 가담했지만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우연히 현장에 있던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모지츠카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906년 바르샤바 총독 게오르기 스칼론 Georgi Skalon을 겨냥한 공격은 사실상 여성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반다 크라헬스카 Wanda Krahelska, 조피아 오브차르쿠프나 Zofia Owczarkówna, 알베르티나 헬베르투프나 Albertyna Helbertówna가 그 주역이었다.
역사가 안제이 슈바르츠 Andrzej Szwarc에 따르면,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여성 참여 비율이 가장 높았던 직업은 다름 아닌 '혁명가'였다. 러시아 분할령 폴란드, 이른바 콩그레수프카에서는 그 규모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참여 인원은 여전히 상당했다. 폴란드 사회당의 전투 조직에는 무려 478명의 여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암살 시도에 가담하고, 이른바 '엑스 exy'라 불린 수탈 작전(당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재산을 탈취하는 행동)에도 참여했으며, 무기와 비밀 인쇄물을 밀반입하는 역할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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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피우수츠카(~1918) / 사진: 술레유벡 유제프 피우수츠키 박물관 Muzeum Józefa Piłsudskiego w Sulejów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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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밀수자들은 '드로마데르키 dromaderki'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라 피우수츠카 Aleksandra Piłsudska의 말에 따르면, 당시 유행하던 넉넉한 코트와 망토는 이들에게 훌륭한 위장 수단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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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능숙해지면서 우리는 49파운드에 달하는 탄약이나 비밀 인쇄물을 몸에 지닌 채로도 전혀 의심을 사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피우수츠카는 회고록에서 지인인 한 여성 비밀 활동가의 일화를 전한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어머니에게 숨기고 있었는데, 우연히 사실이 드러나자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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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좀 제대로 된 일을 하는구나. 나는 그 어리석은 사회주의 전단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우리가 1863년에 효과를 봤던 건 바로 이런 '논거'였거든."
모스크바인들에 맞서, 여인들도 우리와 함께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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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보초 근무를 서고 있는 르부프의 여성 군단 / 사진: 폴란드 국립도서관 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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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이 공유한 이러한 전투 경험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폴란드 여성들은 이미 11월 봉기 시기부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초기에는 당대의 기준에 따라 여성에게 사회적으로 허용되던 역할을 주로 맡았다. 자선 활동을 조직하고, 불법 문서를 유포하며, 전투 중 부상자를 돌보는 일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점차 이러한 틀을 넘어섰다. 민족의 봄 Wiosna Ludów 시기에는 '열광자들 Entuzjastki' 모임과 연관된 비비안나 모라체프스카 Bibianna Moraczewska가 대폴란드 봉기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들의 역할은 더욱 직접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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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푸스토부이투브나 초상(1863 & 1870) / 사진: 폴란드 국립도서관 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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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봉기에서 에밀리아 플라테르 Emilia Plater가 상징적 인물이 되었듯, 1월 봉기에서는 안나 헨리카 푸스토보이투브나 Anna Henryka Pustowojtówna가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마리안 랑기에비치 Marian Langiewicz 장군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이들에 대한 신화화된 기억은 문학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예를 들어 아담 미츠키에비치 Adam Mickiewicz의 시 〈대령의 죽음 Śmierć pułkownika〉와 푸스토보이투브나를 다룬 예지 주와프스키 Jerzy Żuławski의 희곡 《독재자 Dyktator》가 그것이다.
무기를 들고 싸운 여성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중 다수는 이름조차 오늘날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마리아 브루흐날스카 Maria Bruchnalska는 봉기 70주년 기념 저서에서 이들을 '조용한 영웅들'이라 불렀다. 그녀는 또, 동시대 사람들이 이 여성들을 "세상의 통상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 매우 괴짜 같은 인물들"로 여겼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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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선 여성들 / 사진: 바르샤바 대학교 도서관 /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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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봉기 초반, 도브라 Dobra 전투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코사크 병사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임신부 마리아 피오트로비초바 Maria Piotrowiczowa의 죽음은 폴란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비극 이후 봉기 지도부는 여성의 직접 전투 참여를 금지했지만, 여성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일부 여성들은 머리를 자르고 남성 복장을 갖춰 입은 채 전선에 나섰으며, 이러한 모습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도 반복되었다.
1912년에는 폴란드 사격대 Polskie Drużyny Strzeleckie 내 여성 부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유제프 피우수츠키 Józef Piłsudski는 여성의 직접 전투 참여를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여성들은 정보, 연락, 보급, 위생 부대 등에서 복무했다.
그럼에도 최소 10명 이상의 여성이 남장과 가명을 사용해 피우수츠키 군단 Legiony Piłsudskiego에서 전투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보병으로 복무한 조피아 플레빈스카 Zofia Plewińska(가명 레셱 포미아노프스키 Leszek Pomianowski)와 포병 반다 게르츠 Wanda Gertz(가명 카직 주호비치 Kazik Żuchowicz)가 있다. 한편, 보조 부대에서 복무한 여성들은 주로 그림자 속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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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여성들의 위치는 참으로 이상했다! 남성들은 전쟁터에서 열렬히 환영받았고, 새로운 군단원이 들어오면 형제처럼 반겼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늘 불신과 경시가 뒤따랐다. '여성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 끊임없이 따라다녔고, 그들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으리라고 쉽게 믿지 않았다. 물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는데도 말이다.
...우리 자신조차도, 전선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병사가 전선 밖에서 가장 용감한 여성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 일쑤였다. 아마도 여기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라는 생각, 무엇보다 전쟁터에서의 무장 투쟁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신념, 나머지는 전투를 보조하는 그림자일 뿐이라는 인식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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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루블린 연합 기념 봉분 Kopiec Unii Lubelskiej 앞 기관총 진지에서 르부프의 여성 군단 / 사진: 폴란드 국립도서관 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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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수츠키 군단을 크게 지원한 조직은 전시 대비 여성 연맹 Liga Kobiet Pogotowia Wojennego이었다. 1913년 창립 모임에 참여했던 마리아 동브로프스카 Maria Dąbrowska는 일기에 이 단체가 "여성에게 큰 영예를 안겨 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녀는 이어 "여성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여성 연맹은 수다스럽거나 경솔하지 않았으며, 차르 치하에서 단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유일한 비밀 조직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916년이 되자 연맹은 정치적 분파를 넘어선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했고, 회원 수는 12,000명에 달했다.
여성들의 전쟁 참여는 1918년 선거권 부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정치인들이 회의적이었지만, 연맹 창립자 이자벨라 모슈첸스카 Izabella Moszczeńska는 이렇게 기록했다.
"여성 연맹의 활동은 어떤 페미니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활동이 폴란드 국가에서 여성 권리 신장이라는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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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르부프 인근에서 진행된 여성 의용 군단 Ochotnicza Legia Kobiet 훈련 / 사진: 폴란드 육군박물관 Muzeum Wojska Polski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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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시기, 앞서 언급된 일부 여성 활동가들은 정치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국회의원이나 상원의원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농민운동가 이레나 코스모브스카 Irena Kosmowska가 그러했으며, 이들은 시민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 국가의 교육을 운영했으며, 반다 게르츠 Wanda Gertz처럼 군사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 참전 용사들은 여전히 국가적 명예와 지위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유리천장에 부딪혀야 했다. 이 점을 멜히오르 반코비치 Melchior Wańkowicz는 이그나치 지에미안스키 Ignacy Ziemiański의 저서 《동부 부대에서 여성들의 활동 Praca kobiet w P.O.W. Wschód》 서문과 후기에서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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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가 독립을 회복했을 때, 손해와 공로,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 존재와 단순한 삶, 싸움과 도움, 직접 목격과 간접 경험 등 모든 이유로 국가에 청구서를 내는 시민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가장 사소한 요구조차 기록될 때 여성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젊은 국가를 위해 쏟아지는 요구의 물결 속에 여성들은 없었다. 여성들은 단단히 뭉친 집단, 일하는 개미, 소수의 장애물, 국가 건설자들이 세우기 시작한 댐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더 멀리 나아간 이들, 즉 르부프, 실레지아, 빌뉴스, 1920년, 정보 활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여기서 제외한다. 여성들은 일부 직책을 맡아 전쟁으로 남은 무력과 업무 압박, 제한된 요구 조건 속에서 일해야 했다. 이는 어리석은 남성들의 질투와 관료들의 경쟁 의식을 자극했다. 결국 여성들은 8급 이하 직위로 밀려났고, 그 직위에서만 겨우 용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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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성인이 되어 각자 자리를 차지했다. 폴란드는 그들에게 일할 기회, 능력을 개발할 기회, 창조할 기회를 제공했다. [...] 만약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옛 정보원 여성에게 주어진 가장 높은 경력이라는 것이, 책임 있는 직위에 있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때로는 아내가 자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허락하며, 가끔은 은밀히 아내를 부양하도록 허락하는 것뿐이라면, 사실상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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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사회 활동가, 페미니스트, 시민... 1918년까지 폴란드 영토에서 여성들의 자발적 조직화(비교적 관점에서) Działaczki społeczne, feministki, obywatelki... Samoorganizowanie się kobiet na ziemiach polskich do 1918 roku (na tle porównawczym)》(2008) | 바르샤바
- 《여성과 정치 세계 Kobieta i świat polityki》(1994) | 바르샤바
- 《1863년: 새로운 폴란드의 탄생 Rok 1863. Narodziny nowej Polski》(2016) | 바르샤바
- 요안나 두프라트 Joanna Dufrat | 《독립적 좌파 운동권 속의 여성들 Kobiety w kręgu lewicy niepodległościowej》(2001) | 토룬
- 도로타 사예브스카 Dorota Sajewska | 《네크로퍼포먼스 Nekroperformans》(2016) | 바르샤바
파트릭 작셰프스키 Patryk Zakrzewski (2017년 8월) | 번역: AL (202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