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노벨상의 역사를 바꾼 선구자
물리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자, 서로 다른 두 과학 분야인 물리학과 화학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된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파리 의학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기도 했다. 나아가 파리 팡테온에 안치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Maria Skłodowska-Curie는 물리학·수학 교사였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도프스키 Władysław Skłodowski와 기숙여학교 교장이었던 어머니 브로니스와바 보구스카 Bronisława Boguska 사이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근면했던 그는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학생이었으며, 수석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이후 장소를 옮겨가며 비밀리에 운영되던 '비행 대학교 Uniwersytet Latający'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열 살에 어머니를 여읜 마리아는, 여섯 해가 지난 뒤 자신의 일기장에 교회의 기만적 관행을 비판하는 글과 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의 《예수의 생애 Żywot Jezusa》의 일부를 옮겨 적었다. 이후 그의 삶에서 신앙과 신의 자리는 점차 과학으로 대체되었다.
1886년, 그는 치에하누프 Ciechanów 인근 슈추키 Szczuki 영지에서 유복한 지주였던 조라프스키 Żorawski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바르샤바 대학교의 학생이었던 카지미에시 조라프스키 Kazimierz Żorawski(훗날 뛰어난 수학자가 된다)와 첫사랑을 경험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계획은 카지미에시 부모의 반대로 좌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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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의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기념비 / 사진: Zofia Bazak & Marek Bazak / East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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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뒤 그는 바르샤바로 돌아와 산업농업박물관 Muzeum Przemysłu i Rolnictwa의 과학 실험실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물리 실험실 책임자이자 사촌인 유제프 보구스키 Józef Boguski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Dmitri Mendeleev의 전직 조교였다. 또한 저명한 학자 나폴레온 밀리체르 Napoleon Milicer가 그를 화학 분석의 세계로 이끌었다.
러시아 당국의 감독 아래 있던 바르샤바 대학교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언니 브로니스와바 스크워도프스카 Bronisława Skłodowska를 따라 1891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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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 대학교에서 그는 물리학과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물리학에서는 수석으로, 수학에서는 차석으로 졸업했다. 1895년에는 여덟 살 연상의 과학자 피에르 퀴리 Pierre Curie와 혼인 신고를 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으로 브르타뉴를 자전거로 여행했다.
두 딸, 이렌 퀴리 Irène Curie와 에브 퀴리 Ève Curie가 태어나며 가족은 더욱 커졌다. 1897년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강화 강철의 자기적 성질에 관한 첫 과학 논문을 발표했다. 이후 그는 앙투안 앙리 베크렐 Antoine Henri Becquerel이 발견한 우라늄의 방사능 현상에 주목하며, 그 연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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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 사진 복원: Piotr Mecik /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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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마리아는 남편 피에르 와 함께 강도 높은 연구를 이어갔고, 그 결과 강한 방사능을 띠며 화학적 성질이 비스무트와 유사한 금속을 발견하게 된다. 마리아는 조국을 기리기 위해 이 새로운 원소에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진 연구 끝에 두 사람은 1898년, 화학적 성질이 바륨과 유사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소 라듐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한다.
퀴리 부부는 자신들의 발견이 인류와 학문을 위해 자유롭게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특허를 출원하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어떠한 물질적 이익도 얻지 않았다.
방사능 연구의 공로로 퀴리 부부와 앙투안 앙리 베크렐은 1903년 노벨 물리학상과 데이비 메달을 수상했다. 마리아는 《방사성 물질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남편을 위해 소르본 대학교에 새로 마련된 물리학 강좌에서 실험실을 이끌었다.
1906년 피에르 퀴리 Pierre Curie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마리아는 그의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이후 그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Académie des Sciences 정회원 선출에 도전한다. 이미 노벨상을 수상했고, 파리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세 차례 상을 받았으며, 에든버러·제네바·맨체스터 등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은 과학자였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볼로냐·프라하의 과학 아카데미와 크라쿠프 학술원 Akademia Umiejętności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에서는 끝내 선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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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 사진: ©The Granger Collection /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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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언론은 마리아와 물리학자 폴 랑주뱅 Paul Langevin 사이의 1년간의 연애 사실을 폭로했다. 그보다 네 살 어린 유부남이었던 랑주뱅은 마리아를 위해 가족을 떠났다. 선정적인 기사들이 신문 1면을 장식했고, 자신의 사생활은 대중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리아의 해명은 지면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렸다.
사진: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 / 사진: 출판사 엠카
1911년 두 번째 노벨상, 이번에는 화학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의 비난은 차츰 잦아들었다. 수상 연설에서 마리아는 이러한 발견이 남편과 함께 이룬 성과임을 강조하며, 이 상을 피에르의 기억에 바치는 헌사로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이듬해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파리에 라듐 연구소 Institut du Radium 설립을 주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군 병원을 위한 방사선 진료 체계를 조직하고, 딸 이렌 퀴리(훗날 화학자이자, 어머니에 이어 두 번째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와 함께 직접 현장에서 활동했다.
마리아는 조국 폴란드와도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바르샤바에서 온 장학생들은 파리의 퀴리 연구소 Laboratoire Curie에서 연구를 수행했고, 바르샤바 학술회 Towarzystwo Naukowe Warszawskie는 마리아에게 미로스와프 케른바움 방사선 연구소 Pracownia Radiologiczna im. Mirosława Kernbauma의 원격 책임을 맡겼다. 1932년에는 모금으로 구입한 1그램의 라듐을 기증하며 바르샤바에 라듐 연구소 Instytut Radowy를 개관했다.
과도한 방사선 노출로 인한 악성 빈혈로 마리아는 1934년 7월 4일 프랑스 알프스의 상셀모즈 Sancellemoz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처음에는 파리 근교 소 Sceaux의 퀴리 가문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95년 남편과 함께 파리 팡테온 Panthéon으로 이장되며 프랑스가 기리는 인물로 영면하게 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의 타계 이후, 자신이 알고 지낸 사람들 가운데 명성에 의해 타락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저자: 야누시 R. 코발칙 Janusz R. Kowalczyk (2018년 12월) | 번역: AL (202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