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론의 장인 –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키에실로프스키의 일면
그가 소년이었을 때 꿈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어떻게 ‘협력’ 하였나? 왜 기차역은 그의 저주의 장소가 되었나? 그의 영화에 팽배한 신비주의는 어디서 온 것일까?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Krzysztof Kieślowski의 알려지지 않은 일면들을 소개한다.
이사
그의 어린 시절은 짐 싸기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함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휴양병원이 있는 곳, 기후가 더 나은 곳, 큰 공장이 없는 곳들로 이사를 다녔다. 그 중 한 곳은 소코워프스코 Sokołowsko에 있는 휴양소였다. 수데티 Sudety 산맥의 작은 시골, 실롱스키에 다보스 Śląskie Davos라고 불리는 이 곳에서 몇 년 전부터 키에실로프스키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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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실로프스키 감독의 가족이 살던 소코워프스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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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에 전혀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영화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아임 소소 Krzysztof Kieślowski: I'm So-So> 에서 감독의 고백이다. "전 화부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살았던 집들은 중앙 난방이 있었는데, 보일러로 난방을 했었죠.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스코브론이었어요. 그리고 그 친구는 이미 화부로 일하고 있었고, 저는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화부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부모님은 중앙난방 보일러에 불을 때는 일에 대한 저의 열광을 이해하지 못하셔서 저를 학교에 넣으려고 하셨죠. 아버지는 저를 소방학교에 보내셨어요. 사실 굉장히 현명한 결정이셨던 것 같습니다 [...] 왜냐하면 거기에서 확실히 난 소방수가 되고 싶지는 않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만약 아버지가 저를 보일러실에서 일하게 했으면, 아마 금방 난 화부가 되고 싶지 않구나 하고 깨달았을 거에요."
극장의 뒤편에서
그는 소방수가 되지도, 화부가 되지도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바르샤바 극장의 장치를 담당하는 기술자를 기르는 실업중학교로 보냈다. 교감인 삼촌 덕에 아버지는 크시슈토프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고, 여동생 또한 역시 같은 학교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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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생필품 말고 다른 것들을 제작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다른 종류의 양식을 공급하는 인생의 다른 층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영혼이라던지 지성을 위한 양식이었지요."
크시슈토프는 극장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무대의상을 담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연출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연극 학교에 입학하려면 다른 대학의 졸업 자격증이 필요했다.
영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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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텔스카 & 체스와프 페텔스키 부부의 학생시절 습작 영화 <돈 가브리엘>에 출연한 키에실로프스키 / 사진: 포토테카 / 국립영화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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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학을 꼭 마쳐야 한다면, 바로 ‘연극 연출’이라는 전공을 할 수 있는데 뭐하러 역사나, 폴란드어나, 사회학 같은 걸 공부하나 싶었어요. ‘영화 연출’이라는 전공을 마치면 어떻게든 뭐라도 연극 연출에 대해서는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 그건 과정이었지, 목표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는 영화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 입학까지 두 번이나 시험에서 떨어져야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감독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죠. [...] 이 놈들이 내가 들어오는 게 싫단 말이지, 그럼 난 꼭 들어가고야 말겠어." 세 번째 시험을 보러 가서 그 자리에서 통과되었을 때, 그는 너무나 기뻐 잔디밭에서 공중제비돌기를 하고 안경을 집어 던진 후 구두로 밟아버렸다고 한다.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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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가지 색. 블루>의 한 장면 / 감독: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 배우: 줄리엣 비노쉬 / 사진: MK2/CED/FRANCE 3 / East News
그는 인기가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금새 여자친구가 바뀌는 크시슈토프를 부러워하곤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한 번은 친구와 함께 더블 데이트에 나갔는데, 키에실로프스키는 이전에 마음에 들었던 여자 친구를 만나고, 그 여자 친구가 키에실로프스키의 친구를 위해 자기 친구를 데려오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들끼리의 계약에는 변동사항이 생겼는데... 친구에게 소개해주려고 데려온 마리아 카우틸로 Maria가 키에실로프스키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2주후 키에실로프스키는 마리아 카우틸로에게 청혼한다. 이후 마리아 키에실로프스카 Maria Kieślowska는 그가 죽을 때까지 부부로 인생을 함께 하였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Krótki film o miłości> 와 이후 <세가지 색: 블루 Trzy kolory. Niebieski >와 같은 영화의 성공 이후, 전 세계의 여배우들이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를 원했다. 까뜨린느 드뇌브 Catherine Deneuve 는 <세 가지 색: 블루>에 출연하기 위해 출연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으며, 키에실로프스키의 영화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혔던 배우 중에서는 니콜 키드만 Nicole Kidman도 있었다.
배우 키에실로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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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역의 키에실로프스키 영화 야누시 모르겐스테른 Janusz Morgenstern의 <목숨보다 더 큰 판돈Stawka większa niż życie>, 사진: 국립필모테카 포토테카
영화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키에실로프스키는 다른 감독들의 일을 보조하고 자신의 습작영화를 처음 만들어봤을 뿐 아니라,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직접 서기도 했다. 자신의 <희망곡 콘서트 Koncert życzeń> 에서는 소떼를 몰고 가는 자전거 타는 사람으로, 에바 페텔스카 Ewa Petelska와 체스와프 페텔스키 Czesław Petelski 부부의 <돈 가브리엘 Don Gabriel>에서는 군인 중 한 사람으로 출연했다. 배우로 마지막 출연한 작품은 마레크 피보프스키 Marek Piwowski의 <죄송하지만, 여기 싸우고 있나요? Przepraszam, czy tu biją?>이다.
다큐멘터리 – 물 한 방울 속의 세상
영화학교에서 키에실로프스키는 세 사람을 숭배했다. 브레송 Bresson, 베르히만 Bergman, 카르바시 Karbasz. 그 중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는 영화학교 강의진 중 하나였던 카르바시로, 뛰어난 다큐멘터리 감독이며 교육자였다. 키에실로프스키에게 카르바시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야기할 자신의 세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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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시슈토프 비에시비치키 Krzysztof Wierzbicki의 다큐멘터리에서 키에실로프스키는 주위의 세상이 매우 우울했다고 회고한다. ‘주위는 흑백도 아니었어요, 그저 흑색이었죠. 어쩌면 회색일 지도 모르겠군요. 영화학교가 있는 그 장소, 우츠Łódź가 바로 그런 곳이었어요. 우츠는 굉장히 사진이 잘 받는 도시죠. 더럽고, 할퀴어져 있고, 도시 전체가 다 그래요. 그러니 어떻게 말하면, 전 세계가 그런 거죠. 그 도시의 벽들처럼, 사람들의 얼굴도 그래요. 지쳐있고, 슬프고, 눈 속에는 비극이 있죠. 무의미의 비극,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위해 종종걸음 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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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실로프스키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러한 사회주의 소우주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며 묘사하고 있다. 마치 물방울 속의 세상처럼. <초등학교 Szkoła podstawowa>, <공장 Fabryka>, <관공서 Urząd> 와 같은 영화의 작은 장면 장면으로 키에실로프스키는 폴란드 공산주의 시기의 진짜 모습을 그려낸다.
"당국에 보내는 편지 Listy do władz"
영화학교 졸업 이후 키에실로프스키는 헤움스카 Chełmska 거리의 다큐멘터리 제작소에서 일을 시작했고, 주로 영상 기록 작업을 했다. 이곳에서 만난 젊은 촬영감독 야체크 페트리츠키 Jacek Petrycki는 이후 키에실로프스키의 작업의 오랜 동반자가 되었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현실을 묘사하며 공상주의 시스템의 거짓됨을 발가벗겨 보여주었다. 그의 영화에 대해 토마시 지가드워Tomasz Zygadło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당국에 보내는 편지’였죠." 키에실로프스키는 당국이 용납할 수 있는 것과, 검열에 걸릴 만한 것들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당국을 화나게할까 봐 겁이 났었고, 사실은 계속 당국을 화내게 하고 있었어요." 수 년이 흐른 후 키에실로프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다큐멘터리의 끝 – "완전 이상한 놈을 만들어냈네. Niezłego kretyna z faceta zrobiłeś.
키에실로프스키의 작품세계의 전환점 역할을 한 다큐멘터리는 <야간 수위의 시선에서 Z punktu widzenia nocnego portiera>이다. 자신의 ‘권력’에 취한 수위의 이야기는 도덕성을 파괴하는 시스템에 대한 고발이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친분을 쌓고, 몇 년 후에는 그를 단역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완전 이상한 놈을 만들어냈네. Niezłego kretyna z faceta zrobiłeś." 크라쿠프의 영화제에서 키에실로프스키가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 아그니에슈카 홀란트 Agnieszka Holland가 한 말이다. 주인공의 행동을 보며 관객들은 연이어 폭소를 터뜨렸고, 키에실로프스키는 영화가 계속됨에 따라 더 깊이 소파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고 한다. 그의 목적은 웃기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거기에서 시작된 거 같습니다. 더 이상 다큐멘터리 영화 만드는 것이 싫어진 거죠." 예지 슈투르 Jerzy Stuhr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키에실로프스키 자신은 다큐멘터리를 떠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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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이 장르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를 떠나게 된 것이 아쉽고도 창피합니다. 마치 가라앉는 배를 구하려는 것도 영예롭게 함께 가라앉는 것도 아닌, 거기서 도망친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큐멘터리 영화는 가라앉고 있습니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 사라지고 있죠."
그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했다. 학교 친구들은 키에실로프스키에 대해 그는 시간만 나면 (만약 그 시간을 여자친구와 보내지 않는다면) 가게에서 나사, 오토바이에 들어가는 베어링, 도구를 찾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덕분에 바르샤바에 있는 오토바이 수리 가게는 다 알았죠." 당시 친구였던 야누시 스칼스키 Janusz Skalski의 말이다.
"시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할 줄 알았어요. 오토바이도 분해해서 맞춰냈죠. 자동차 엔진도 분해해서 다시 조립했어요. 저희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공구상자를 들고 와 나사를 다 풀고, 샹들리에를 다 빼고, 문 자물쇠를 다 떼어내곤 했죠." 키에실로프스키의 친구이자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가로 작업을 해온 크시슈토프 피에시에비치 Krzysztof Piesiewicz의 말이다.
친구들은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열정을 자기 집 일에 좋다고 이용하곤 했다. 스와보미르 이지아크 Sławomir Idziak 은 이런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키에실로프스키 앞에서 괜히 차를 만지는 계략을 쓰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죠. 곧 옆으로 비키라고 하고 자기가 고쳐줄 것을 알고있었으니까요."
키에실로프스키의 취미는 목공이었다.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라고 크시슈토프 비에시비치키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불행히 이 일에는 재능이 전혀 없네요. 나무로 만든 물건이 한 백 개는 되는데, 전부 다 일상 용품이고요. 무조건 직각이 맞아야 하는데, 절대로 직각을 똑바로 못 만들겠어요."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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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실로프스키 후기 작품 중 대부분에는 기차역이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플랫폼에서 계속해서 작별하고, 그 위에서 만나고, 이 곳에서 어떤 인물들의 운명이 정해지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기차 옆에서 과거와 이별한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젊었을 때 폴란드 곳곳을 여행했고, 기차역 앞 술집에 대해 자신만의 순위를 매기고 있었다고 한다. 어디서 최고의 슈니첼을 먹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집 고기완자를 먹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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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연>의 촬영장에서 타데우시 웜니츠키 & 보구스와프 린다 / 사진: 로무알드 피엔코프스키 / 국립필모테카 포토테카
그러나 기차역은 어느새 그에게 저주받은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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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 키에실로프스키는 <100개의 질문 100 pytań do>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기차역에서 촬영을 하는 것은 정말 좋아하지 않아요. 동물과 아이들이 나오는 장면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피에시에비치와 뭘 하던 간에 요즘은 항상 기차역에 기차, 아이들, 동물이 나오고야 마네요."
공산당의 유혹
키에실로프스키가 일하는 계급의 단체 초상과도 같은 영화 <노동자 71 Robotnicy 71> 을 찍었을 때, 정부는 이 영화에 대해 대중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부적합하지만, 감독의 사회 참여정신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정치적인 교육을 받게 되었고, 정부는 그에게 사회주의적 틀을 주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이력서 Życiorys>는 그야말로 정부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바로 그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 영화 평론가이자 키에실로프스키 전문가인 타데우시 소볼레프스키Tadeusz Sobolewski의 말이다. 영화를 선전에 활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공산당 정부와 함께 만든 영화지만, 키에실로프스키의 영화는 전혀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당시의 권력에 자신의 독립성을 굽히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주위에 포진해 있던 저항세력들의 열기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정권의 눈물을 노래하는 시인
키에실로프스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화계는 그에 대한 끝없는 찬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키에실로프스키가 언제나 영화계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한때 동료들은 그를 ‘정권의 눈물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는 아이러니 섞인 말로 부르기도 했다고 아그니에슈카 홀란트는 회상한다. 그가 정권과 협력하고 있다고, 그를 나쁘게 생각했다고, 반정부 투쟁 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자유노조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않고, 소소한 안정, 집, 가정, 삶의 최소한 만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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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마추어 Amator>촬영장에서 예지 노바크 / 사진: 로무알드 피엔코프스키/ 국립필모테카 포토테카
다른이들이 흑백이 분명한 서사를 기대했던 곳에서 키에실로프스키는 다의성을 보았다. <아마추어 Amator> 중 한 장면에서 키에실로프스키는 공산주의자들의 편을 들었고, 이에 대해 영화계는 그를 심하게 비판하였다. 영화 <끝없는 Bez końca> 에서 알렉산데르 바르디니 Aleksander Bardini가 연기한 변호사가 저항세력의 운동가에게 권력에 대한 의미없는 저항을 그만두고 스스로의 자유를 찾으라고 설득하자 키에실로프스키는 모두에게서 거센 공격에 휘말린다. 반정부세력, 영화계, 교회, 공산정권까지, 정권조차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메시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내던 이들 역시 이 사건 이후 키에실로프스키와는 악수도 하지 않았다.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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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실로프스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보통 사람들의 초상이었지, 거대 정치가 아니었다. 그는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그는 <십계 Dekalog>의 천사와 같은 감독이 되려고 노력했다. 공감능력과 이해력을 갖춘 관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정치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쉬운 판단도, 혁명적인 열광도 배제하고 이야기 하곤 했다. <십계>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키에실로프스키는 촬영 감독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영화계 모든 사람들이 12월 13일 이후에는 무조건 자유노조, 공산주의, 지하 신문에 대한 영화만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사건들은 그의 영화에 확실한 흔적을 남기기는 했다. <우연>과 <일하는 짧은 하루 Krótki dzień pracy>는 자유노조 현상에 대한 그의 반응을 담고 있고, <끝없이>는 계엄령 시대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오랫동안 기억될 안졔이 바이다 Andrzej Wajda감독의 <대리석 인간 Człowiek z marmuru> 의 예지 라지비워비치Jerzy Radziwiłowicz가 연기한 주인공의 죽음은 한 사상의 상징적인 죽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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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모스크바에서.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왼쪽에서 세 번째)가 크렘린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화 <아마추어 Amator>의 성공을 축하하는 축배를 들고 있다. 손님으로 참석한 이들 중에는 보이치에흐 마르쳬프스키Wojciech Marczewski와 크시슈토프 멩트라크 Krzysztof Mętrak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예지 코시니크 Jerzy Kośnik / Forum
계엄령 이후에 키에실로프스키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카메라 렌즈 대신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이를 마치 투쟁의 무기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일관성을 가지고 반정부 투쟁의 성명서에는 서명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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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끔찍하다. 지금 난, 화장실 갈 때 휴지가 필요하다는 사실만이 관심이 있다."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가 자신의 제자인 안드레스 베이엘에게 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 그우프치체 Głupczyce 의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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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슈투르의 영화 <커다란 동물 Duże zwierzę>의 한 장면, 시나리오는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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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섯 살 때, 나는 길거리에서 코끼리를 보았다. 내가 코끼리를 보았다는 사실을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이후에 사람들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내가 코끼리를 보지 않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그우프치체의 거리에 어떻게 코끼리가 나타나겠냐고 하면서."
키에실로프스키는 그의 영화의 ‘신비주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이 이야기를 회상하였다. 키에실로프스키는 비밀을 믿었다. 그가 살고 있는, 만질 수 있는 세상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외에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흥분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그 감성은 철학자들의 이론에서도, 위대한 영화적 발견에서도 온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 시절부터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로서 시골 마을의 광장에서 코끼리를 보았던 그 때부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아이디어로 쓴 것이 <커다란 동물>의 시나리오이고, 키에실로프스키의 사후에 예지 슈투르가 영화로 만들었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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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포스터를 만들건 상관 없는 것은 아니다." 키에실로프스키는 80년대 말에 이렇게 쓴 바 있다. "어떤 포스터 아티스트들은 나는 완전히 믿는다. 그들이 만든 포스터를 보면, 나는 표를 구해 극장에 가려고 애쓴다. 어떤 이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용이 없다. 그들이 뭘 좋아하는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의미로 영화 포스터는 영화 제작의 일부이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자기 영화의 포스터를 만들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세심하게 골랐고 자신이 믿고 있는 사람들을 추천했다. 그들에게는 그리고 그들에게는 마음대로 할 자유를 주었다.
"포스터는 네가 만드는 거고, 난 영화를 만드는 거지. 네가 내 영화에 참견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네 포스터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어?" 고정으로 영화의 포스터를 만들었던, 그리고 대부분 자신 영화의 포스터를 만들었던 퐁고프스키 Pągowski에게 한 말이다.
서방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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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색: 레드 Trzy kolory: Czerwony> 개봉일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와 이렌느 야콥 Irene Jacob, 마린 카르미츠 Marin Karmitz , 칸느 영화제 1994, 사진 예지 코시니크 / Forum
<십계>의 성공 이후 키에실로프스키는 전 세계의 유명 영화제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서방세계에 대한 동경은 없었다.
키에실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외국은 어디를 가던 간에 낯선 기분이 들고, 별로 좋지 않아.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언제나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지." 할리우드에도 그는 별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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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나에겐 정말 맞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요." 키에실로프스키는 말한다. "그건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좋게, 정말 좋게, 아니 굉장하게 부풀려 우쭐해서 말하는 태도에요. 내 미국 에이전트를 만난단 말이죠, 그리고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어요. 그럼 그는 언제나 ‘Extremely Well’이라고 말한다고요. 아니, 그냥 ‘ok’나 ‘well’도 아니고, 꼭 ‘extremely well’ 이라고. 나는 그러면 바로 전혀 ‘extremely well’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요. 그리고 대부분 나는 ‘well’도 아니라고요. 난 그냥 ‘so-so’ 에요."
비관주의
키에실로스프키는 언제나 컵이 반은 비어있다고 생각했다. "제 성격에 굉장히 좋은 점이 있죠, 그건 바로 제가 비관주의자라는 것이에요." 그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전 모든 일이 최악으로 치달을 거라 상상해요. 미래는 시커먼 구멍과 같죠. 만약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미래에요."
신이라고? 꿈 깨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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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퐁고프스키의 포스터 <끝없이> / 사진 GAPLA
키에실로프스키는 자신의 종교적 성향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끝없이> 영화가 개봉한 후, 크시슈토프 크워포토프스키 Krzysztof Kłopotowski가 가톨릭계 잡지에 키에실로프스키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며, 대중이 그의 위장된 형이상학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자 키에실로프스키는 매우 상처를 받았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이를 농담으로 이야기하곤 했지만, 그는 자신을 언제나 교회의 바깥, 도그마의 현실과 종말론적 질문에 대한 쉬운 답변과는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티비와의 인터뷰에서 키에실로프스키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영화 <십계>를 만든 사람으로서 죽어서 하늘에 가게 되면 거기서 신이 당신에게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키에실로프스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거기에 가면, 일단 그를 깨워야겠죠. 만약 거기 신이 있다면, 분명 자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전 이렇게 말할 거에요. 일어나요! 일어나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꼴 좀 봐요!"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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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자서전 Autobiografia> / 편집: 다누타 스토크Datuna Stok 편집 / 크라쿠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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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에 대하여: 숙고, 회상, 의견 O Krzysztofie Kieślowskim: refleksje, wspomnienia, opinie> / 저자: 스타니스와프 자비실린스키 Stanisław Zawiśliński / 바르샤바,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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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실로프스키: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Kieślowski: ważne, żeby iść> / 저자: 스타니스와프 자비실린스키 / 바르샤바,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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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실로프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Dokumenty Kieślowskiego> / 미코와이 야즈돈 Mikołaj Jazdon / 포즈난,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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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I’m so so Krzysztof Kieślowski: I'm So-So> / 감독: 크시슈토프 비에시비츠키 Krzysztof Wierzbi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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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얼라이브.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에 대한 영화 Still alive. Film o Krzysztofie Kieślowskim> / 감독: 마리아 즈마시-코차노비치 Maria Zmarz-Koczanowicz
저자: 바르토시 스타슈치신 (발행일: 2020년 12월 4일) / 번역: 이지원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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