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코 미학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폴란드계 화가이다. 1898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980년 멕시코에서 생을 마쳤다.
-
Picture display
standardowy (864px desktop)
타마라 웸피츠카 초상화 복제본(1928~1929) / 《타마라 드 웸피츠카. 모더니티의 여왕 Tamara de Łempicka. Królowa nowoczesności》 전시(2011) / 로마 비토리아노 Vittoriano (조국의 제단) / 사진: Donatella Giagnori / EIDON / Forum
Picture image
Reprodukcja portretu Tamary Łempickiej, 1928-1929, fotografia z wystawy "Tamara de Łempicka. Królowa nowoczesności", Vittoriano, Rzym, 2011, fot. Donatella Giagnori / EIDON / Forum
타마라 웸피츠카 Tamara Łempicka는 세계적으로 '타마라 드 렘피카' Tamara de Lempicka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아르데코 화가이다. 상인이자 산업가였던 부유한 러시아계 유대인 아버지 보리스 구르비크고르스키 Borys Gurwik-Górski와 유복한 폴란드 가문 출신의 어머니 말비나 데클레르 Malwina Dekler 사이에서 태어났고, 오빠 스타니스와프 Stanisław와 여동생 아드리안나 Adrianna와 함께 바르샤바에 있는 외가, 데클레르 가문의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데클레르 가문은 사교계와 문화계의 엘리트에 속했으며,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Ignacy Jan Paderewski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Artur Rubinstein 등과도 친분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삶에서 사라졌다. 그의 부재를 둘러싼 사정은 웽피츠카에게 고통스럽고도 깊이 숨겨진 비밀로 남았다. 부모가 이혼했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자살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Picture display
standardowy (864px desktop)
1900년대의 타마라 웸피츠카 / 사진: Bettmann Archive / Getty Images
Picture image
Tamara Łempicka, 1900, fot. Bettmann Archive
/ Getty Images
성인이 된 웸피츠카는 자신이 폴란드인임을 거듭 강조했다. 출생지를 모스크바가 아닌 바르샤바로 기재했으며, 이를 위해 출생 기록을 위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화가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작품을 해석하려는 작업은, 그의 전기가 창작 활동과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살았던 세계의 분위기는 작품 속에서 어렵지 않게 감지되며, 스스로 신화화한 개인적 서사는 예술 경력에서 자기 연출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보여준다.
Embeded gallery style
display gallery as slider
1911년 타마라는 친척인 스테파 스티페르 Stefa Stifer와 마우리치 스티페르 Maurycy Stifer 부부가 거주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예술 아카데미의 드로잉 강좌를 수강했고, 저녁에는 사교계와 문화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티페르 부부는 그를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공연과 유수포프 공작 가문의 개인 극장, 그리고 로마노프 왕조의 여름 별궁이 있던 차르스코예 셀로 Tsarskoye Selo에서 열리는 엘리트 리사이틀과 음악회에 데려가곤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층의 한 무도회에서 그는 젊은 변호사이자 사교 생활을 즐기는 이른바 '봉 비방 bon vivant'이었던 타데우시 웸피츠키 Tadeusz Łempicki를 만나게 된다. 바르샤바 출신인 그의 가문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예비 궁전'에 거주하고 있었다. 타데우시의 어머니 마리아 노르비트 Maria Norwid는 시인 치프리안 카밀 노르비트 Cyprian Kamil Norwid의 조카였다.
타마라는 191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웸피츠키와 결혼했다. 같은 해 애칭 키제트 Kizette로 불리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Krystyna가 태어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 속에서 타데우시 웸피츠키가 체포되었으나, 석방된 뒤 부부는 덴마크에서 재회했으며 1918년 여름 파리로 떠났다.
Picture display
mały obrazek (568px desktop)
1932년 파리, 타마라 웸피츠카의 초상 / 사진: IMAGNO / Austrian Archives / Forum
Picture image
Portret Tamary Łempickiej, Paryż, 1932, rep. IMAGNO /Austrian Archives / Forum
프랑스로 이주한 타마라 웸피츠카 Tamara Łempicka는 파리의 사립 미술학교 아카데미 랑송 Académie Ranson에서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에게 사사했다. 드니는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으로 알려진 교사였으며, 그의 지도 아래 젊은 예술가들은 화면 구성의 기초를 충실히 익히고 회화 기법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또한 예술의 미적·장식적 가치에 대한 그의 견해와 실제 작업 방식 역시 웸피츠카의 예술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웸피츠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또 다른 스승인 화가이자 장식가,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였던 앙드레 로테 André Lhote였다. 그는 살롱 회화의 규범을 현대화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실험적 회화의 형식을 도입해 이를 쇄신하고자 했다. 인상주의의 색채 실험에서부터 화면 공간을 구성하는 입체주의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를 수용했지만, 그의 작업은 인상주의, 특히 입체주의가 르네상스 이후 이어져 온 전통적 재현 체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했던 아방가르드적 실험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로테의 목표는 급진적인 혁신에 있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중산층의 보수적인 취향에 부응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구매하는 작품이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절충적이고 정제된 형식을 마련하고자 했다.
웸피츠카는 로테의 아틀리에에서 무엇보다도 현대적인 재현 기법을 푸생 Poussin, 다비드 David, 앵그르 Ingres로 이어지는 위대한 고전주의 회화 전통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법을 익혔다. 그의 작품은 단순화된 기하학적 입체 형태로 형상을 구성하면서도 이를 고전적 질서 속에 안정감 있고 조화롭게 배치하는 포스트입체주의적 양식을 보여준다.
웸피츠카는 예술 전통에 대한 탐구를 꾸준히 이어갔다. 르네상스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옛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러한 배움의 영향으로 밝고 맑으며 생동감 있는 색채를 구사했고, 그림의 세부까지 놀라울 만큼 정교하게 마무리했다. 양식화되고 때로는 거의 매너리즘적으로까지 보이는 형태와 인물 표현은 작품에 강한 장식적 효과를 더했다.
전통과 모더니즘이 어우러진 이러한 양식과 두드러진 장식적 성격은 당시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는 웸피츠카가 큰 인기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대 중반 아르데코 미학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웸피츠카의 명성도 빠르게 높아졌다. 그는 파리의 살롱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작품을 전시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폴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웸피츠카 작품의 중요한 가치는 주변 세계를 관찰한 결과를 자신만의 회화 언어로 효과적으로 표현해낸 데 있다. 그의 초상화는 동시대 인물들의 군상을 이루며, 이는 곧 그가 속해 있던 사회적·문화적 엘리트, 다시 말해 그의 일상을 구성하던 인물들이었다. 개별적인 특성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모습과 어우러지고, 조형적 구성은 다루는 주제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Picture display
standardowy (864px desktop)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 Autoportret w zielonym Bugatti》(1925) / 타마라 웸피츠카 / 사진: Marek Skorupski / Forum
Picture image
Tamara Łempicka, "Autoportret" w zielonym Bugatti", 1925, olej na desce, rep. Marek Skorupski / Forum
웸피츠카의 그림에는 이른바 '광란의 1920년대'라 불리는 시대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예컨대 1929년에 제작된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 Autoportret w zielonym Bugatti》은 당시의 해방된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된다. 잡지 《라 폴로뉴 La Pologne》의 한 기자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Text
"타마라 드 렘피카는 현대적인 여성을 모델로 삼는다. 이 여성들은 부르주아적 도덕이 요구하는 위선이나 수치심을 알지 못한다. 햇볕에 그을리고 바람에 단련된 그들의 몸은 아마조네스처럼 유연하고 탄탄하다."
Picture display
standardowy (864px desktop)
《생모리츠 Saint-Moritz》(1929) / © 타마라 드 렘피카 재단 Tamara de Lempicka Estate LLC / 사진: 크라쿠프 국립박물관 보도자료
Picture image
tamara_lempicka_saint-moritz_1929_c_tamara_de_lempicka_estate_llc.jpg
웸피츠카가 활동하던 시대는 데카당스의 분위기가 강하게 배어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그의 작품과 사생활을 함께 살펴보면, 둘 모두 그 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의 삶의 방식은 당시 사회가 통상적으로 받아들였던 도덕적 규범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여성과 남성을 넘나든 웸피츠카의 수많은 연애는 사실이든 소문이든 간에 도덕적 체면을 의식해 숨기지 않았고, 오히려 독립적인 예술가이자 자율적인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세간의 이목을 끈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Gabriele d'Annunzio와의 관계는 결국 결혼 생활에 결정적인 위기를 불러왔고, 1927년 이혼으로 이어졌다.
1940년대 웸피츠카는 할리우드 스타들과 사교계·금융계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초상화가로 자리 잡았고, 그곳에서또한 화려하고 데카당스적인 사교 생활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전후 미술이 초현실주의와 추상으로 재편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자, 그 인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초현실주의적 풍경화나 질감을 강조한 표현주의적 추상을 시도하는 등 화풍의 급격한 변화를 모색했지만, 결국 웸피츠카의 경력은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62년 남편이 세상을 더난 이후 웸피츠카는 붓을 내려놓고 멕시코로 이주했으며, 1980년 3월 18일 쿠에르나바카 Cuernavaca에서 생을 마쳤다.
출처
- 《타마라 드 렘피카: 카탈로그 레조네 1921–1979 Tamara De Lempicka: Catalogue Raisonné 1921–1979》(2004) | 알랭 블롱델 Alain Blondel | 출판: 로얄 아카데미 북스 Royal Academy Books | 런던
- 《타마라 드 렘피카: 아르데코와 데카당스의 삶 Tamara de Lempicka: A Life of Deco and Decadence》(1999) | 로라 클래리지 Laura Claridge | 출판: 클락슨 포터 Clarkson Potter | 뉴욕
- 《타마라 드 렘피카: 파리에서의 미술 비평과 여성 예술가 Tamara de Lempicka: Kunstkritik und Künstlerinnen in Paris》(1993) | 엘렌 토르만 Ellen Thormann | 출판: 라이머 Reimer | 베를린
저자: 마그달레나 브루벨스카 Magdalena Wróblewska (2010년 7월) | 번역: AL (202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