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 운영과 전간기 활동
1912년 야누시 코르착은 병원 근무를 완전히 그만두고 크로흐말나 Krochmalna 거리 92번지에 거주하였으며, 새롭게 문을 연 유대인 고아원 ‘돔 시에로트 Dom Sierot’의 원장직을 맡았다. 이 고아원은 고아복지협회 Towarzystwo Pomoc dla Sierot의 후원을 받는 기관이었고, 코르착은 이곳에서 스테파니아 빌친스카 Stefania Wilczyńska와 협력하였다. 빌친스카는 그의 교육 철학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고아원의 발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돔 시에로트는 코르착이 아동의 심리적·신체적 발달을 매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으며, 그의 독창적인 교육 실험이 실제로 구현된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아동 의회, 아동 재판소, 학생 신문, 아동 공증소, 실습 작업장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다양한 제도들이 도입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코르착은 군에 징집되었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의 야전 군 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이어 키이우 근교의 우크라이나 아동 보호소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 협력하게 될 마리아(마리나) 팔스카 Maria(Maryna) Falska를 만났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정 속의 아이 Dziecko w rodzinie》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1919년에 출간된 네 권짜리 교육서 연작 《아이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Jak kochać dziecko》의 첫 번째 권이었다. 이 연작은 1920년에 전권이 완간되었다. 1918년 바르샤바로 돌아온 코르착은 돔 시에로트에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9년 11월 야누시 코르착은 마리아 팔스카 Maria Falska가 운영하던 아동 보호 시설 ‘나시 돔 Nasz Dom(우리의 집)’과 긴밀히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 기관은 1921년부터 나시 돔 협회 Towarzystwo “Nasz Dom“의 관할 하에 운영되었으며, 코르착은 이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의사이자 교육자로서 활동하였다다. 1928년 나시 돔이 비엘라니 Bielany 지역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그는 이 기관과 지속적으로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1926년 코르착은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실험 주간지 《마위 프셰글롱트 Mały Przegląd》(꼬마 신문)의 창간을 주도하였다. 이 잡지는 일간지 《나시 프셰글롱트 Nasz Przegląd》(우리 시사신문)의 부록으로 발행되었는데, 거의 전적으로 “아이들에 의해, 아이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그는 1930년까지 편집장을 맡았고, 이후에는 이고르 네베를리 Igor Newerly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 《마위 프셰글롱트》의 마지막 호는 1939년 9월 1일 금요일에 발간되었다.

1938년 바베르(현 마리신 바베르스키)에 위치한 돔 시에로트의 부속 여름캠프 루지치카에서 야누시 코르착이 고아원 아동 및 직원들과 함께한 모습 / 원본 사진은 현재 이스라엘 게토전사기념관 Ghetto Fighters’ House에서 소장 / 사진: 바르샤바 코르차키아눔 코르착문서·연구센터 제공
1920년대 코르착은 교사 및 교육자 양성 기관과 협력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그는 국립모세교종교교사범학교 Państwowe Seminarium dla Nauczycieli Religii Mojżeszowej, 그리고 사회교육 실천 과정을 운영하던 폴란드자유대학 Wolna Wszechnica Polska과 협력 관계를 이어갔으며, 이 가운데 특히 국립특수교육연구소 Państwowy Instytut Pedagogiki Specjalnej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