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언어
18세기 말부터 1918년까지 폴란드는 정치적, 문화적 독립을 상실하였고, 폴란드가 분할 점령되었던 식민 통치시대에 폴란드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지역에서 금지되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극장이었다. 연극 덕분에 대부분의 낭만주의적 상징들은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한 세기에 달하는 기간 동안 극장은 폴란드성을 보존해온 장소였다.
양차 세계 대전 20년 동안의 짧은 독립의 순간이 지난 후, 폴란드는 소비에트 블록의 일부가 되어 폴란드 연극 씬은 공산주의 사상 선전 도구이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을 전파하기 위한 장소로 새로운 권력에 봉사했다. 하지만 연극은 문화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정부가 문화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이와 예술가를 검열했던 가장 험난한 세월에도 꽃피웠다. 예술가들은 고도로 발달한 상징과 암시의 어휘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검열의 눈을 피해서 관객들은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을 쉽게 이해했다. 또한, 연극은 관객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름 붙여지지 않는 공동체 의식을 체험하는 순간을 제공했다. 그렇게 무대는 사회주의 폴란드 시대에도 역시 국가적이자 매우 극적인 토론의 장소가 되었다. 공개적으로 모두는 시스템을 찬양했지만, 모두 감춰진 의사소통의 코드를 통해 체제 전복적이고 금지된 내용을 전달하고 있었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필요성은 폴란드 연극의 예술성을 더욱더 발전시켰으며, 연극적 형태로 감춰진 의미들을 전달하는 연극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게 하였다. 이 시기에 고도로 세련된 프로덕션 기술들이 발전하였는데, 무대, 조명 디자인, 의상, 음악과 음향 효과 모두가 연출 컨셉과 함께 유기적으로 변화하였다. 이 당시의 연극에서 모든 뉘앙스는 의미가 있었다. 언어를 통해서는 한가지 메시지를 보내면서, 무대 디자인이나 음악을 통해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제안하는 방식이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런 식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모순적으로 보이긴 하나, 사실 사회주의 시스템은 폴란드 연극을 경영과 재정면에서 발전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폴란드의 모든 극장은 정부 지원 구조를 통해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공산주의 시스템은 예술가들이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물을 낼 필요 없이, 예술적 연구와 실험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시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길러낸 것이 예쥐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나 타데우쉬 칸토르(Tadeusz Kantor)와 같은 재능 있는 연출가들을 길러냈다. 그로토프스키와 칸토르는 모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자기만의 독특한 어휘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극 언어를 만들어 철학적으로 함축적인 연극을 창조했고, 많은 나라에서 열렬한 반응과 호평을 받았다. 두 예술가의 언어는 표면적으로는 유사하다. 그로토프스키는 ‘가난한 연극’이라는 용어와 방법론을 개발하며 배우들이 불필요한 고도의 프로덕션 기술 및 장비를 버리고, 휴머니티의 본질에 다가가는 연극을 추구했고, 칸토르는 헐벗고 가난한, 척박한 환경에 초점을 맞추며 보다 시각예술적 측면의 ‘가난한 예술’을 주창했다.
1989년 이후 폴란드가 자유세계에 접근하게 되자, 반항의 목적은 더 이상 불분명해졌다. 폴란드는 시장경제의 지시에 따르는 민주 국가의 세계에 편입되었고, 문화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동안 연극은 주로 엔터테인먼트의 공급자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기정사실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극작가들과 연출가들이 나오며 폴란드 연극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직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크리스티안 루파 (Krystian Lupa)
1990년대 세대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늘날 폴란드 현대 연극의 위대한 거장인 크리스티안 루파 Krystian Lupa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루파는 오랫동안 문화적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에서 활동하며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사이코드라마를 만들어왔다. 루파는 인간의 본성, 특히 그 침투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겹겹의 층위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관심사는 배우들과의 매우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작업들 자체에서 잘 나타난다. 많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루파의 작품들은 연극에서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며 우리를 놀라게 한다. 현재 루파의 작품들은 설치를 통해 현실의 시간과 똑 같은 시간에서 일어나는데, 앤디 워홀에 영감을 받은 집단적 환타지인 ‘팩토리 2 Factory2’는 무려 8시간짜리 공연이지만, 루파가 창조하는 환경의 시공간은 실제로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배우들을 이용해서 관객을 위해 시간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크쉬슈토프 바를리코프스키(Krzysztof Warlikowski), 그줴고쉬 야쥐나(Grzegorz Jarzyna)의 터부 없는 연극
루파의 제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크쉬슈토프 바를리코프스키와 그줴고쉬 야쥐나를 들 수 있다. 함께 테아트르 로즈마이토시치(Teatr Rozmaitości, 바르샤바 버라이어티 극장 – 이후에 바르샤바 극단 TR Warszawa라고 이름이 바뀌었다)을 맡으며 바르샤바 연극계에 새로운 에너지를 몰고 왔다. 이들은 1989년 사회변혁 이후의 후유증을 진단해 낸 첫 번째 세대의 연극인들이다. 관중들의 관심을 새로운 사회의 병폐로, 과거에 비해 불분명한 새로운 적에게로 돌린 것이다. 이들은 전례 없는 다양성을 추구했고 미성숙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에는 입에 담을 수도 없었던 사회적인 터부를 찾아내어 이들을 넘어섰다. 바를리코프스키의 초기 연출작들 중에서 '말괄량이 길들이기(Poskromienie złośnicy, 1997)'나 '정화된 자들(Oczyszczeni, 2002)' 그리고 야쥐나의 '축하연 (Uroczystość, 2001)', '사이코시스 4:48 (Psychosis 4:48)' 등은 공개적으로 성별과 성적취향, 문제 가정, 인종 차별, 정신병과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국 극작가들의 원작을 사용한 작품들로, 이 모두가 폴란드 문화에서는, 특히나 공개적인 논의에서 제외대어 온 터부의 대상이었다. 이 두 연출가들의 손에서 폴란드 연극은 더 이상 민족 정체성이나 애국적 감수성을 그 주제로 하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대신 이제 개인의 표현에, 사적이고도 내밀한 감성을 제시한 것이다. 바를리코프스키와 야쥐나의 지휘 아래, 논의의 초점은 개개인의 존재와 그 몸, 성적 기호, 도덕적 죄악에 대한 것으로 논의의 초점은 바뀌었다 – 현재 폴란드에서는 자유국가, 열린 사회에서 하듯 이러한 주제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야 클레췌프스카(Maja Kleczewska)와 얀 클라타(Jan Klata), 권력과 속물성에 대항하여
큰 박수를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또 다른 연출가로는 마야 클레췌프스카와 얀 클라타가 있으며, 모두 야쥐나와 바를리코프스키와 나이가 같다. 두 사람은 모두 루파의 제자이며 89년 이후의 신세대로서 폴란드 연극의 앙팡 테리블로 불려진다.
클레췌프스카의 작품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모두에서의 권력의 남용에 초점을 맞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오폴레 Opole의 코하노프스키 극장 Teatr im. Jana Kochanowskiego w Opolu, 2004)'와 젤리네크(Jelinek) 의 '바빌론 (비드고슈츠의 폴란드 극장 Teatr Polski w Bydgoszczy, 2010)'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젤리네크의 텍스트를 과감하게 재해석했는데, 특히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내용과 이라크의 아부 가립(Abu Gharib) 감옥의 장면들을 교차시킨 '바빌론'은 동시대 사건들과 중첩되면서 충격과 불편함을 선사한다.연출가인 클라타는 프쉬비쉐프스카(Przybyszewska)의 희곡 '당통 문제(Sprawa Dantona, 브로츠와프의 폴란드 극장 Teatr Polski we Wrocławiu, 2008)'에서 프랑스 혁명의 대가를 치루게 된 로베스피에르의 지지자들을 '혁명의 아이들' 사운드 트랙을 배경으로 전기톱 밑으로 보내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클라타는 애국적인 영웅 전설과 기념비적인 민족문화에 아이러닉한 치명타를 날렸다. 그의 연출은 매우 가볍고 속도감 있는 스타일로 '소음과 분노'가 가득하며, 고전 작품을 연출할 때는 거의 어김없이 록이나 펑크음악을 배경으로 사용한다. 우스꽝스럽고 심지어는 바보스럽기까지 한 장면들을 연출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이러한 미성숙함의 전형인 클라타 자신은 심각하며,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강한 비판이 그의 목표이다. 클라타는 지금 폴란드 사회에 아직도 표면적으로나마 존재하는 무감각한, 아무런 생각 없는 애국주의를 끊임 없이 의심하고 전복한다.
타협하지 않는 연극, 스트솀프카(Strzępka)와 가르바췌프스키(Garbaczewski)
폴란드 연극계에는 최근 다시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하여 이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파베우 데미르스키(Paweł Demirski)와 모니카 스트솀프카(Monika Strzępka)의 연극들은 녹으로 뒤덮힌 바우브쥐흐의 테아트르 드라마티츠니(Teatr Dramatyczny w Wałbrzychu)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예술과 문화에 적용된 정책들의 언어를 대비시킨다. 이들의 충격적인 '옛날 옛적에 안드줴이, 안드줴이, 안드줴이가 (Był sobie Andrzej, Andrzej i Andrzej, 2010)'는 폴란드 문화에 대한 접근과 예술 창작 수단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던 기성세대에 대한 전례 없는 공격이다.
크쉬슈토프 가르바쳬프스키 Krzysztof Garbaczewski와 마르친 체츠코 Marcin Cecko 의 예술적 협업은 이미 크게 호평 받은 바 있는데, 고전 뿐 아니라 현대 대중 문화의 아이콘을 해체하고 폭로하는 작품이었다. ('죽음의 스타 Gwiazda śmierci, 2010'). '오디세이 (Odyseja, 오폴레의 코하노프스키 극장, 2010)'는 오디세이 신화를 젊은이들답게 재점검한 작품으로, 자기들이 유일하게 주장할 수 있는 시각, 즉 젊고 반항적이지만 힘없는 오디세이의 아들, 텔레마초스의 시각을 보여준다.
마르타 구르니츠카(Marta Górnicka)와 라도스와프 리흐치크(Radosław Rychcik) - 다수에 반反하여
이렇게 타협을 모르는 태도는 마르타 구르니츠카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여성 합창단 (Chór kobiet, 2010-2015)'은 폴란드 사회와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연극적 선언이다. 구르니츠카는 모든 연령대와 배경의 여성들, 연극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여성들도 모두 한 자리에 모아 합창단을 만들어 폴란드 여성의 목소리를 최대한 폭넓게 들려주는 데 주력했다.
이 세대를 대표하며 미학적으로 유사한 방식을 사용하는 연출가로는 '목화밭의 고독' (Samotność pól bawełnianych, 키엘체의 스테판 줴롬스키 극장 Teatr im. Stefana Żeromskiego w Kielcach, 2009)'를 만든 라도스와프 리흐치크이 있다. 연극 겸 펑크록 콘서트 스타일로, 최근 열 몇 개국 이상에서 투어를 했던 작품이다. 리흐칙은 루파의 가장 어린, 가장 반항적인 제자로, 자기만의 무대 언어를 창조하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단호하다. 고전 작품을 고르는 데 있어서도 인용하고, 덧붙이며 재해석할 자기만의 레퍼토리를 따로 가지고 있다. 플로베르, 브레히트, 콜테즈, 바르트, 연출가로서는 클라타처럼 배경음악을 스스로 고르기도 한다. 주제에 있어서는 가장장 사적이고 내밀한 내용, 때로는 인간 존재의 가장 부끄러운 영역을 일관성 있게 다루고 있다.
무장해제 - 여성의 무대 진출
본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폴란드 연극의 이미지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의 급박한 변화에 대한 큰 기색 없이 존속되었다. 폴란드 작품 중 루파, 바를리코프스키, 야쥐나, 클라타, 클레췌프스카, 리흐칙, 가르바췌프스키, 구르니츠카의 작품만이 해외 페스티벌에서 만나볼 수 있었고, 특히 루파, 바를리코프스키, 야쥐나만이 연극 평론가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앞에 언급된 연출가 중 두 명만이 여성이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여성 연출가는 성공하고 인정받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2015년 초반 이후 나타난 '공격적인 창작'을 하는 25세 미만의 젊은 연출가 중 대부분이 여성이다. 일례로 작품에서 현존 시스템의 작용 기반에 대해 비판적인 의문을 던진 마그다 슈페흐트 Magda Szpecht의 흥미로운 데뷔를 들 수 있다. 배우와 관객은 누구인지, 극장 기관은 무엇이며(혹은 무엇이 돼야만 하는지) 어떤 역할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한 돌고래 'Delfin, który mnie kochał (포즈난 콜렉티브 원, Kolektyw One, Poznań, 2015)', '슈베르트. 12명의 연주자와 현악기 콰르텟 낭만곡 Schubert. Romantyczna Kompozycja Na dwunastu Wykonawców i kwartet Smyczkowy (바우브쥐흐 샤니아프스키 극장, Teatr im. Szaniawskiego w Wałbrzychu, 2016)'에서 인간 중심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극장과 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표현의 한계를 시험한다. 첫 번째 작품은 주인공 돌고래와 그의 감정을 담았고 두 번째 작품은 낭만주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의 Franz Schubert의 작품과 전기를 토대로 한 이야기를 테마로 한다.
전문 연기자, 졸업반 학생(바우브쥐흐 수데츠키 체치에고 비에쿠 대학교 Sudecki Uniwersytet Trzeciego Wieku w Wałbrzychu), 관객 모두가 (공동) 창작 활동에 서로 영감을 주고 음악에 반응을 한다. 간혹 현악기 사중주가 방음실에 들어갈지라도, 창작자와 관객은 서로의 역할을 주고 받는다.
연극계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안나 크라시인스키 Anna Karasiński의 뛰어난 작품 '에벨리나 울다 Ewelina płacze(2015)'는 바르샤바 TR의 클래식하고 성스러운 무대의 센세이션이었다. 크라시인스키의 다음 작품 '두 번째 공연 Drugi spektakl(포즈난 폴스키 극장 Teatr Polski w Poznaniu, 2016)'은 그녀의 독창적이고 파괴적인 작품 성향을 뒷받침하는 작품이다. 그녀는 예술가로서 본인의 작품을 통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통제는 우리 자신의 통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스템, 의미, 의미, 묘사의 통제를 의미한다.
그녀의 두 작품은 극장에서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엇이 일어나야만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극장의 일상, 관객과 배우의 역할, '액션'의 발전, 관습,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지루한 클리셰 속에 살아가는지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크라시인스키는 '에벨리나 울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을 무대로 불러낸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제게 정확히 의미하는 바와 다른 것으로 이성을 다루죠. 제 공연은 파도와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관객을 항상 웃음과 불안이 섞인 상반된 감정 상태로 만들죠."
또 다른 예로는 카타쥐나 칼바트 Katarzyna Kalwat와 마르타 소콜니츠카 Marta Sokolnicka 듀엣의 새로운 창작 에너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안나 크라시인스카와 마찬가지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아방가르드 작곡가 토메크 시코르스키 Tomek Sikorski의 삶과 창작 활동을 담은 연극 'Holzwege (바르샤바 TR, 2016)'를 통해 바르샤바 TR로부터 그리 크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두 연출가는 '발견 Found'의 시나리오 작품에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연기 플랜, 창작 '증거'의 존재, 라이브로 시코르스키의 작품을 연주하며 담담하게 무대의 현실과 허구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토메크 시코르스키의 진정한 가까운 친구였던 유명 작곡가 지그문트 크라우츠 Zygmunt Krauze를 한 데 섞었다.
폴란드적 정체성
신세대는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말하지만, 또한 계속하여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중요한 것들을 배워나가기도 한다. 신세대의 연출가들은 공통적으로 대담하게 지금까지 성소화되고 터부시되어 왔던 텍스트, 주제, 목적을 찾고, 거칠 것 없는 면에서도 비슷하지만, 형식과 미학적 접근의 면에서는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야쥐나의 우아한 스펙타클이 돋보이는, 고도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프로덕션에서부터, 바를리코프스키의 기념비적인 디자인, 루파의 연극적인 환타지, 그리고 스트솀프카와 데미르스키, 가르바쳬프스키의 작품에서 볼수 있는, 다 벗겨지고 까발려져서 이해하기 쉬운 리얼리티가 있는 새로운 가난한-대중 연극, 거기에 리흐치크와 구르니츠카의 미니멀리스트다운 추상적인 무대 장치에 이르기까지, 폴란드 연극은 그야말로 전례 없이 다양해진 스타일과 형식을 자랑하는 많은 작품들을 열성적으로 끌어안고 있다.
폴란드에서의 연극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1989년 이후 다시 폴란드 연극은 진정한 독립적 공간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러한 자유스러운 공간은 예술적 탐구와 실험의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연극은 다시 한번 폴란드에서 인생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동-서의 중간에 위치한 나라로, 복잡한 역사 속에서 역동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나라로서, 폴란드의 연극은 현대 세상을 묘사하는 새로운 언어를 계속해서 창조하는 중이다. 폴란드가 스스로를 연극을 통해서 이해하는 만큼, 폴란드 연극을 보는 것은 폴란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저자: Joanna Klass
번역: 안나 디니에이코 Anna Diniejko, 이지원, 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