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만다라, 한국의 피카소
이수경의 작품 속 타라 보살처럼, 폴란드인 우르슐라 브롤 Urszula Broll도 명상에 잠겨 있었다. 주위에는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1976년 5월, 폴란드의 산업 중심지 카토비체에 있는 오래된 공동주택의 다락방이었다. 아래 거리에서는 노동절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광부와 제철소, 모범 노동자들을 찬양하는 행렬이었을 것이다. 라파우 크시엥직 Rafał Księżyk은 예술가 그룹 오네이론 Oneiron의 이야기를 여러 목소리로 풀어낸 책 『시니알니아. 실롱스크 언더그라운드 Śnialnia. Śląski underground』에서 이런 장면을 묘사한다. 브롤은 당시 남편이었던 안제이 우르바노비치 Andrzej Urbanowicz와 함께 이 그룹에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주의 시대에 종교가 탄압받으면서 폴란드의 많은 젊은이는 정신적 공허함을 느꼈고, 오네이론의 구성원들은 비밀리에 신비주의와 오컬트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대부터는 이들 사이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들은 독일에서 들여온 『티베트 사자의 서』와 같은 문헌을 폴란드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작업실은 명상을 위한 공간인 '젠도 zendo'로 변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폴란드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선구자들이 됐다.
1960년대 우르슐라 브롤은 자신이 '기하학적 수채화'를 그린다고 말했다. 당시 작품의 중심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형상이 자리하고, 나머지 화면은 원과 삼각형, 사각형이 만화경처럼 반복되는 형태로 채워졌다. 크시엥직에 따르면 브롤은 매일 그림을 그렸고, "그림이 저절로 내 안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몇 년 뒤 힌두교 탄트라 미술의 도판이 실린 책을 선물받은 브롤은 놀랐다. 자신이 직관적으로 그려온 그림이 수천 년 동안 명상 수행과 함께해온 만다라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브롤은 1983년부터 산속의 집에서 생활하며 화가로서도, 불교의 선구자로서도 당시 이미 전남편이 된 안제이 우르바노비치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브롤이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뒤, 바르샤바 크룰리카르니아 Królikarnia에서 열린 전시 ⟪아트만은 호흡을 뜻한다 Atman znaczy oddech⟫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그의 작품 세계도 비로소 제대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브롤의 '기하학적 수채화'가 ⟪통과의례⟫에서 다시 관객을 만난다는 점은 더욱 반갑다. 이 작품들은 영성이 정치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이어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한국의 화가 박생광은 우르슐라 브롤과 반대 방향으로 정신적 여정을 떠났다. 다른 문화에서 출발해 자신의 문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1904년에 태어난 박생광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가 시작되기 몇 년 전 세상에 나왔다. 이후 교토로 건너가 일본화의 거장들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들은 일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점차 인기를 얻던 서양식 회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통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일본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의 작품은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박생광은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전통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년의 작품에서는 조선시대 유교 엘리트들에게, 이후에는 기독교인들에게 억압받았던 한국 고유의 무속 전통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전국의 사찰과 무속 전통에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광주 폴란드 파빌리온에서는 평소 개인 소장품으로 보관되어 있는 ⟨무속 5⟩가 전시된다. 작품에는 독특한 모자를 쓴 여러 무당이 등장한다. 이들이 쓰는 모자는 의례의 대상이 되는 신에 따라 달랐다. 부채와 푸른색 장식띠 같은 무속 도구들도 보인다. 인물들은 궁궐이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하게 장식된 들보 아래 자리한다.
박생광은 1985년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에 파리에서 전시를 열었고 그곳에서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