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가 주는 삶의 5가지 교훈
폴란드를 대표하는 위인 중 한 명인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단순한 과학자를 넘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가졌던 철저한 원칙과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5가지 교훈을 소개합니다.
1867년 11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Maria Skłodowska-Curie는 지식과 교육에 대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19세기 당시 러시아 제국 점령 하에 있던 폴란드는 여성의 고등교육기관 진학을 불허했고, 집안 사정 또한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기에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리로 이주해 소르본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고,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새로운 원소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중의 일반적인 의견과 반대되는 '여성도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한 산증인이기도 합니다.
이후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삶의 고통을 극복하면서 홀로 두 자녀를 키워냈고, 두 번째 노벨상을 받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유럽 과학계의 슈퍼스타로 거듭난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소 중 하나인 라듐 연구소 설립에 기여했고, 전쟁 영웅의 역할을 인정받으며 세계 최초로 프랑스 팡테옹에 묻힌 여성 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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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피에르 퀴리 & 마리 스크워도프스카-퀴리 (1904년) / 사진: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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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유럽의 몇 안 되는 명문대학 중 하나인 소르본 대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수년간 가정교사로 근무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라듐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고자 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는 이 사실을 믿기를 꺼렸습니다. 의심하는 이를 설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라늄 광석에서 소량의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광석에는 아주 미량의 라듐이 함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0.1g의 순수한 라듐을 얻기 위해서는 충분한 광석, 완벽한 환기 시설 및 청결도를 잘 갖춘 깨끗한 실험실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비록 몇 톤의 광석을 무료로 얻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단순 창고에 불과한 시설을 갖춘 실험실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퀴리 부부는 난방과 환기 시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붕 누수로 겨울에는 까무러치게 춥고 여름에는 질식할 정도로 더운 실험실 환경에서 꿋꿋이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시설에서 방사능과 유해 연기에 노출되며 광석을 분리하는 거친 물리적 작업을 진행하며 4년의 세월을 보냈다. 남편 피에르 퀴리는 전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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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컨테이너를 운반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고, 철제 교반기를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광석을 장시간 가열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그들은 몇몇 대학에서 받은 좋은 일자리까지 마다하며 4년간 무일푼으로 실험실 조교가 할법한 일을 하였습니다. 비록 건강과 경력에 악영향을 줄지라도 미래의 대의를 위해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결국 노벨상 수상이라는 성과로 돌아왔고,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역사상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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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딸 이레나 졸리오-퀴리 & 손녀 헬레나 (1930) / 사진: 출판사 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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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신물질 발견이라는 과학자의 경력에 큰 성취를 주는 업적을 쌓았고, 그 이상의 일까지 이뤄낸 인물입니다. 그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원칙의 전파자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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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누구도 발견을 통해 이익을 낼 의도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고, 연구 결과와 광석에서 순수한 라듐을 추출하는 방법을 언제나 공개 발표했다. 더욱이, 다른 과학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우리는 모든 지식을 공유했다. 이는 라듐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고 [...] 과학자와 의사에게 필요한 재료를 제공했다."
이러한 이타적인 태도의 연구는 의학(방사선 검사 & 암 치료), 산업(산업용 방사선 촬영),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라듐은 물질 자체가 지닌 속성 그 자체로 투자자들을 매료시켰고,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수입의 대부분을 방사능에 대한 추가 연구와 라듐 연구소 설립을 위해 지출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학 회의 중 하나인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서 찍힌 이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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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양자역학 솔베이 회의 / 사진: 벤자민 쿠프리 (국제 솔베이 물리학 연구소, 벨기에 브뤼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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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과학과 정치의 세계는 남성에 의해 절대적으로 지배되었습니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노벨상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퀴리 부인'으로 불리며 남편의 비서라는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방사능 논쟁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자질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같은 주제를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를 향해 여성 혐오적인 의견을 거침없이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에 겁먹거나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연구를 이어갔고, 결국 가장 큰 승리를 획득했습니다. 라듐과 폴로늄, 그 화합물의 특성에 대한 추가 연구를 통해 두 번째, 그리고 단독 노벨상을 받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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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버밍햄 (1913년) / 사진: 엠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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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실험실에서의 평생 연구'라는 그의 꿈과는 반대로 유명인사에 가까운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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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리의 발견은 과학자를 비롯해 대중에게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희귀한 물질인 라듐은 고가에 팔렸고,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라듐의 인기는 마니아층을 일궈냈고, 사업가들은 라듐이 포함된 화장품, 치약, 팔찌, 음료, 의약품에 심지어 사료까지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커플은 단숨에 유명인사가 되었고, 다양한 언론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1906년 피에르 퀴리가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후,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음모론을 제시했고, 타블로이드는 마리아와 다른 과학자의 염문설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언론이 떠드는 스캔들과 가십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언론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 날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라듐 1g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10만 달러라는 연구자금과 이를 지원해줄 스폰서가 필요했습니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미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한 모금 캠페인에 참가했고, 1921년 미국을 여행하며 강의와 인터뷰를 이어갔다. 가는 곳마다 환영과 찬사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필요한 연구자금 마련에도 성공하였습니다.
알버트트 아인슈타인은 스크워도프스카-퀴리의 인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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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는 명성이 타락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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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버밍엄 대학교 명예학위 수여 후 (1913년) / 사진: 출판사 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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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혹은 마리 퀴리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평생 조국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폴란드가 독립을 되찾은 뒤, 바르샤바에 라듐 연구소를 설립해 조국의 재건에 가속도를 더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팡테옹에 묻힌 프랑스 국민 영웅 중 하나라는 대접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상주의적 평화주의자이면서도, 1차 세계대전 당시 한가로이 침묵을 지키지 만은 않았습니다.
1914년 초 프랑스 정부는 스크워도프스카-퀴리가 제시한 이동식 방사선 실험실 아이디어와 기술자 및 의사 훈련 계획을 받아들였고, 그가 주도하는 인력훈련과 야전 의학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에는 300개의 이동식 방사선 실험실이 운영되었고, 수천 번의 검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이후,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프랑스인인가, 폴란드인인가. 그에 대한 국적 논쟁은 양국 간의 끝없는 우호의 투쟁입니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는 불굴의 정신과 용기를 가진 과학자로, 과학 발전에 대한 공헌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을 향한 투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물질과 생명의 비밀을 추적하기 위해 지식의 한계를 끝없이 밀어냈습니다. (...) 나의 목표는 파스퇴르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평화를 통해 무지와 전쟁을 이겨낼 것이라 믿는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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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리포바 거리 공공도서관 외벽의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를 기리는 벽화 《나는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Urodziłam się w Warszawie》 / 사진: Bartłomiej Zborowski / 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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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프랑수아 기루드, ⟪마리 퀴리⟫ 로랭 레미르, ⟪자서전: 피에르 퀴리에 대한 추억⟫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저자: 보이치에흐 올렉시아크 (2016년 8월) / 번역: AL (2021년 3월 / 최종 업데이트: 2024년 11월)